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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37

(0103) 원장(院場)교회(평남 대동군) -3․1만세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벌인 교회- -3․1만세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벌인 교회- 원장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었는데 대동군은 평양의 만경대구역․형제산구역, 그리고 공항이 있는 순안구역과 붙어 있다. 평양의 서부지역에는 예전에는 대동군이었다가 평양으로 흡수된 곳들이 많다. 대동군에는 교회들이 많았다. 1929년말 대동경찰서에서 작성한 기록을 보면 대동군 안에는 장로교가 53개, 감리교가 2개, 교인이 6,543명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38년에는 교회가 78개로 늘어나 있었다. 대동군에 김형걸(金亨杰) 장로가 있었는데 이 분은 대동군 안에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김형걸 장로는 성경지식이 풍부했고, 성품이 매우 강직해서 ‘호랑이 장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3․1 만세 시위에 앞장 서다 ▣ 원장교회는 임찬모(林.. 2023. 9. 4.
(0100) 신시(新市)교회(평북 구성) -학당(學堂)을 빌려 예배드리며 출발한 교회- ◉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 10회를 맞아 드리는 인사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가 100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를 아껴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①평안북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②함경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③황해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④평안남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그 다음에는 ⑤감리교회를 비롯해서 장로교가 아닌 교파에 속해 있었던 교회들, 특히 경기도와 강원도의 북부지역에 있었던 교회들, 이런 순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방 전에 북한에 있었던 교회들의 숫자를 고려해서 구성한 순서입니다. 해방 전에 북한 지역에는 장로교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우선,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고, 열심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2023. 8. 30.
(0095) 박천(博川)교회(평북) -이상하게 교회가 많지 않았던 박천군의 중심교회- -이상하게 교회가 많지 않았던 박천군의 중심교회- 박천교회가 있었던 박천군은 평안북도의 남부 끝부분이고, 청천강과 대령강(大寧江)을 끼고 있고, 평야지대이고, 명주를 많이 생산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인데 특히 도로교통이 편리한 곳이고, 주변에 동쪽으로는 핵 기지로 유명한 녕변이 있고, 서쪽으로는 해방 뒤에 새로 생긴 운전군과 정주시가 있는 곳이다. 1811년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는데, 박천은 홍경래 난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홍경래는 조정에서 서북 사람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에 항거해서 난을 일으켰다. 조선왕조는 서북 사람들을 심하게 차별했는데 기독교가 이 지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골고루 사랑하십니다’하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이것이 서북지역에서 기독교가 왕성해진.. 2023. 8. 23.
(0093) 진지리(眞池里)교회(평남용강군) -감리교회였다가 장로교회가 된 교회- -감리교회였다가 장로교회가 된 교회- 평남선(평양-남포)과 룡간선(룡강-온천군)이 갈라지는 룡강역 앞에 ‘참못터’가 있다. 예전에 거기에 ‘참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잉어를 먹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잉어를 잡기 어려웠는데 아들이 이 참못에 와서 잉어를 잡아다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드렸다는 전설이 있다. 진지동교회의 ‘진지(眞池)’는 이 ‘참못’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 감리교회로 출발하다 ▣ 진지리교회는 1897년에 세워졌다. 진지리교회는 처음에는 감리교회였다. 김창식(金昌植)이라는 분과 임형주(林亨柱)라는 분이 전도해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김창식은 나중에 감리교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분이다. 이들의 전도로 김선규(金善奎), 김덕규(金德奎.. 2023.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