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양시9 (0098) 연화동(蓮花洞)교회(평남 평양) -장대현교회의 ‘손자 교회’-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남문밖교회가 설립한 교회) -장대현교회의 ‘손자 교회’- (장대현교회에서 세운 남문밖교회가 설립한 교회) 「1938년 장로교주소록」에는 연화동교회의 주소가 일본식 행정구역인 ‘평양부 팔천대정(八千代町) 40번지’로 적혀 있는데 그곳의 원래 이름은 연화동이다. 연화동은 연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지금 평양의 중구역에 속해 있는데 북한에서는 ‘련화동’이라고 적는다. 련화동은 1967년에 련화1동과 련화2동으로 나누어졌다. 북한의 당창건사적관이나 평양의학대학 부근에 연화동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날로 배가된 교회▣ 연화동교회는 1911년 봄에 평양남문밖〔南門外〕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남문밖교회에 대해서는 61번 참고). 남문밖교회는 평양에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최초로 세운 교회인데 평.. 2023. 8. 28. (0074)박구리(礡九里)감리교회(평양 소재) -광혜여원(여성전용병원)에서 출발한 교회 - -광혜여원(여성전용병원)에서 출발한 교회 - 박구리감리교회는 많은 기록에 ‘전구리(磚九里)감리교회’로 잘못 나온다. 벽돌 전(磚)자와 널리덮일 박(礡)자가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양의 지명에 대한 북한쪽의 자료들이 ‘박구리’로 되어 있고 해방 직전에 이 교회를 담임했던 고 박대선(朴大善) 목사(연세대 총장 역임)가 남긴 기록에도 박구리교회로 되어 있다. 박구리는 돌을 넓게 가공해서 다듬잇돌을 만들던 곳이라고 한다. 원래 박석동이라고 했는데 부근의 대구동, 소구동을 합하면서 ‘구’자를 따와서 박구리가 되었다. ▣ 빠른 속도로 성장하다 ▣ 박구리감리교회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 평양에 제일 먼저 들어가서 선교하다가 과로로 순직한 간 홀 선교사의 부인 로제타 홀 선교사(의사)가 평양에 여성병원병원.. 2023. 7. 20. (0067) 고정(高町)교회(평양 소재) - 강량욱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 -강량욱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평양에 있었던 고정교회는 1923년에 세워졌다. 해방 전에는 이동희 목사․김영로 목사․ 정명채(鄭明采) 목사․이의주 목사․김인준 목사 등이 고정교회를 담임하였다. ▣ 김인준 목사 ▣ 정명채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인데 이웃 기독교 신자 가정의 찬송소리를 듣고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정주 오산중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다. 의주 양실(養實)학교 교사로 있을 때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의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고.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다음에 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교회의 조사생활을 시작했고, 193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했다.(25회) 첫 목회는 삼등(三登)교회에서 했.. 2023. 7. 11. (0061) 남문밖〔南門外〕교회(평양 소재) -지금의 김일성 광장 부근에 있었던 교회 - -지금의 김일성 광장 부근에 있었던 교회 - 평양 남문밖교회는 1903년 10월 31일에 세워졌다. 남문밖교회는, 평양에 있었던 장로교회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장대현교회에서 첫 번째로 분립된 교회이다. 그러니까 평양에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가 되는데, 그래서 “제2교회”라고도 한다. 장대현교회에서 그 다음에 분립된 교회, 제3교회가 창동(倉洞)교회(창동교회에 대해서는 29번을 볼 것)이고 그 다음에 분립된 교회가 산정현(山亭峴)교회이다.. 산정현교회가 세워질 때 남문밖교회 교회 교인 일부가 산정현교회로 갔다. 당시에는 교회들이 교구제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남문밖교회는 동은 대동강, 서는 보통강, 남은 한사강(寒寺江), 북은 대동문으로 가는 길, 이렇게 구역을 정하고 그 안에 사는 교인.. 2023. 7. 3.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