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황해도34 (0121) 신촌(新村)교회(황해도 송화군) -예전엔 송화군, 지금은 과일군에 있었던 교회- -예전엔 송화군, 지금은 과일군에 있었던 교회- 신촌교회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에 있었는데, 송화군에는 교회가 대단히 많은 편으로서 1938년도 장로교 주소록을 보면 송화군 안에 설흔여섯 개의 교회 이름이 나온다. 송화군에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풍천읍(豐川邑)교회와 송화읍교회가 잘 알려져 있다. 신촌교회는 1912년에 세워졌다. 기록을 보면 덕홀(德屹)교회가 신촌교회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덕흘교회라는 이름은 장로교 주소록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또 ‘덕흘리’라는 지명도 발견되지 않는다. ▣ 황해도 출신들이 담임하다 ▣ 신촌교회는 처음에는 평신도 두 분이 교회를 지도했는데 그 이름이 유동승(劉東承)과 김형목(金亨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방학성(方學聖) 목사가 담임.. 2023. 10. 12. (0116) 황해도의 성결교회들 -1934년 당시 황해도에는 아홉 개의 성결교회가 있었다- -1934년 당시 황해도에는 아홉 개의 성결교회가 있었다-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이번으로 116번째인데, 그동안 성결교는 신의주서부성결교회(0011), 해주성결교회(0020), 신의주동부성결교회(0033), 진남포성결교회(0044), 이렇게 넷만 다루었다. 해방 이전 한국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 특히 장로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밖의 교파들은, 그 교파에 속한 교회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 사리원성결교회, 안형주 목사 ▣ 1934년 4월을 기준으로 할 때 황해도에는 성결교회가 아홉 개가 있었다. 이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는 1938년에 있었던 교회들의 명단을 기초자료로 하고 있다. 왜 그러느냐 .. 2023. 10. 4. (0112) 재령(載寧)중앙교회(황해도) -일제강점기말에 태어나서 해방 직전에 문을 닫은 비운의 교회- -일제강점기말에 태어나서 해방 직전에 문을 닫은 비운의 교회- 재령중앙교회가 있었던 황해도 재령에 대해서는 재령동부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0015) 언급한 일이 있다. ▣ ‘기독교 천하’ 재령 ▣ 그때, 농경지가 많은 곳으로서, 북률미(北栗米)라는 품질 좋은 쌀이 생산되고, 복숭아가 유명하고, 천주교가 아주 강했고,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들이 여럿 활동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재령은 개신교, 특히 장로교가 매우 왕성했었던 곳이다. 재령에는 미 북장로교의 선교기지가 세워져서 장로교의 황해도 선교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했다. 재령에는 재령동부교회를 비롯해서 교회들이 많았다. 재령동부교회의 처음 이름은 재령읍교회였다. 재령에는 교회에서 세운 명신(明新)학교와 제중병원이 있었고, 재령성경학교가 있어서 교역자.. 2023. 9. 19. (0107) 홀동(笏洞)교회(황해도 수안군) -금광에서 시작된 교회- -금광에서 시작된 교회- 홀동교회는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구면(水口面) 보광리(寶光里)에 있었는데 보광리의 옛 이름이 홀동이었다. ‘홀(笏)’은 조선왕조 때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손에 쥐던 패를 말하는데, 옛날에 임금을 따라 왔던 어떤 관리가 그만 홀을 여기에 두고 간 일이 있어서 이곳을 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홀동에는 금광이 있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해방 직전에 홀동금광의 금광석을 진남포의 제련소에 운반하는 사업을 했다. 홀동은 보물이 빛을 발하는 곳이라고 하여 보광리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보석리(寶石里)가 되었다. 해방 후 이 지역을 로동자구로 승격시킬 때 옛 이름을 찾아 ‘홀동로동자구’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백여배와 그의 친구들의 기도 ▣ 홀.. 2023. 9. 11. 이전 1 2 3 4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