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093) 진지리(眞池里)교회(평남용강군) -감리교회였다가 장로교회가 된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8. 21.

(0093)진지리교회(평남용강군).pdf
0.71MB

-감리교회였다가 장로교회가 된 교회-

평남선(평양-남포)과 룡간선(룡강-온천군)이 갈라지는 룡강역 앞에 참못터가 있다.

예전에 거기에 참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잉어를 먹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잉어를 잡기 어려웠는데 아들이 이 참못에 와서 잉어를 잡아다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드렸다는 전설이 있다.

진지동교회의 진지(眞池)’는 이 참못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 감리교회로 출발하다 ▣

진지리교회는 1897년에 세워졌다진지리교회는 처음에는 감리교회였다.

김창식(金昌植)이라는 분과 임형주(林亨柱)라는 분이 전도해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김창식은 나중에 감리교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분이다.

이들의 전도로 김선규(金善奎), 김덕규(金德奎), 김창규(金昌奎) 등이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사촌형제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김창규는 나중에 감리교 목사가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목회를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부근에 있는 이화동교회(梨花洞敎會)에 출석하면서 수요일에는 김선규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신자가 점점 늘어나서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나중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구역을 나누어서 선교를 하게 되었는데, 평안남도 용강군의 경우, 일부는 미감리회에서 선교를 담당하고, 일부는 북장로회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

진지리교회는 지운면에 있었는데 이곳은 북장로회 선교구역이 되어 진지리교회는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선교구역 분할에 따라서 이렇게 교파가 바뀐 경우가 여럿 있었다.

 

▣ 역대 담임자들 ▣

진지리교회가 감리교회였던 시절에는 노블(W.A. Noble; 魯普乙) 선교사와 무어(J.Z. Moore; 文約翰) 선교사가 자주 이곳에 와서 교회를 지도했다.

노블 선교사는 1892년에 한국에 와서 2년 뒤부터 평양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많은 수고를 했다.

감리교에서는 지역 책임자를 감리사라고 부르는데, 노블 선교사는 여러 지방의 감리사를 동시에 역임하는 일이 많았다.

한 때는 한국 감리교의 90%가 이 분의 책임 밑에 있었다고 한다.

 

무어 선교사는 1903년에 한국에 와서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는데 특히 학교를 여럿 세우고 육성했다.

평양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진남포의 삼숭학교, 영변의 숭덕학교에는 이 분의 수고가 깃들어 있다.

무어 선교사는 한국말을 누구보다도 능통하게 구사한 선교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다음에는 김몽한(金蒙漢) 전도사가 진지리교회를 담임했다.

 

진지리교회가 장로교회가 된 다음에는 김치근(金致根) 목사가 부임했다.

이 분은 평양장로회신학교 17회 졸업생인데 끝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해방 뒤 공산정권은 북조선기독교도연맹(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교회가 정권에 협력하는 일에 앞장세웠는데, 당시 평서노회의 중진이었던 김치근 목사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적극 협력을 했다.

이 분은 용강에 과수원과 논과 밭 등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적극 협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에는 이정규(李正奎) 목사가 수고했고, 1940년을 전후해서는 임재수(林載洙) 목사가 담임했다.

 

▣ 용강군의 중심지에 있었던 교회 ▣

진지리교회의 주소는 평남 용강군(龍岡郡) 지운면(池雲面) 진지리 2945호였다.

진지리교회는 평서노회(平西老會) 소속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남포특별시 룡강군 룡강읍이 되어 있다.

남포는 행정구역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2010년에 남포특별시로 승격이 되면서 강서군대안군온천군룡강군천리마군이 남포특별시에 편입되었다.

통일선교의 모든것 유니미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