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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121

(0121) 신촌(新村)교회(황해도 송화군) -예전엔 송화군, 지금은 과일군에 있었던 교회- -예전엔 송화군, 지금은 과일군에 있었던 교회- 신촌교회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에 있었는데, 송화군에는 교회가 대단히 많은 편으로서 1938년도 장로교 주소록을 보면 송화군 안에 설흔여섯 개의 교회 이름이 나온다. 송화군에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풍천읍(豐川邑)교회와 송화읍교회가 잘 알려져 있다. 신촌교회는 1912년에 세워졌다. 기록을 보면 덕홀(德屹)교회가 신촌교회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덕흘교회라는 이름은 장로교 주소록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또 ‘덕흘리’라는 지명도 발견되지 않는다. ▣ 황해도 출신들이 담임하다 ▣ 신촌교회는 처음에는 평신도 두 분이 교회를 지도했는데 그 이름이 유동승(劉東承)과 김형목(金亨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방학성(方學聖) 목사가 담임.. 2023. 10. 12.
(0120) 단천읍(端川邑)교회(함남 단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 선생과 관계 있는 교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 선생과 관계 있는 교회- 함경남도 단천시는 납과 아연을 많이 생산하는 검덕(檢德)광산, 마그네사이트를 채굴하는 룡양(龍陽)광산 등, 광산이 여럿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단천에는 제련소도 있고 공업대학들도 있고, 휴양소도 있다. 북한의 대표적 매체인 「로동신문」에는 검덕광산과 룡양광산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린다. 검덕광산은 지금은 검덕광업련합기업소라는 이름으로 단천시의 대표적인 기업이 되어 있다. 검덕광산은 원래는 은을 생산하던 곳으로서, 일제가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노동을 시킨,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단천에는 남대천(南大川)이 흐르는데 남대천의 물은 공업용수, 관개용수, 식수로 잘 사용되고 있다. 단천에는 북대천(北大川.. 2023. 10. 11.
(0119) 길상(吉祥)교회(평북 구성) -로버츠(나부열)선교사가 담임했던 교회- -로버츠(나부열)선교사가 담임했던 교회- 평북 구성은 조선조 세조 때 정주에서 분리되었는데, 이곳에는 자연지형을 잘 이용해서 쌓은 성이 있었다. 그 성들로 둘러막힌 산줄기들이 거북이 잔등을 닮았다고 해서 그 성을 구성(龜城)이라고 불렀고, 지명도 성(城)의 이름을 따랐다. ▣ 구성에서 다섯 번째로 세워진 교회 ▣ 구성에는 일찍 교회들이 세워졌다. 구성 서북쪽에 의주가 있는데 의주는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가장 빨리 들어온 곳이다. 의주의 초기 기독교인 가운데 한 분인 백홍준(白鴻俊)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백홍준은 사위인 김관근(金灌根)과 사돈인 김이련(金利鍊 : 김관근은 김이련의 둘째 아들)에게 전도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했다. 그 때 마펫, 게일 등.. 2023. 10. 10.
(0118)두남리(斗南里)감리교회(함남 덕원)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고향에 있었던 교회-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고향에 있었던 교회- 두남리감리교회의 예전 주소는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현면(縣面) 두남리 627의 2이였다. 덕원군은 원래 의주(宜州)라고 부르다가 1413년에 의천군(宜川郡)이라고 했는데 세종대왕 때인 1437년에 이성계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하여, ‘덕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덕원군(德源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일제 강점 직후에는 원산부가 되었는데, 일제는 1914년에 원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교외(郊外) 지역을 덕원군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 덕원군을 나누어서 원산시와 문천군에 편입시켜버려 덕원군은 없어졌다. 두남리감리교회가 있었던 두남리는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 룡천리(龍川里)가 되어 있다. 용천리는 원산시의 동남부지역으로 바다를.. 2023.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