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사 김익두(金益斗)목사의 모교회(母敎會)-
안악읍교회는 황해도 안악군에 있었는데, 안악군은 지금은 황해남도에 속해 있다.
안악군은 황해남도 동북부, 재령강 연안지역이며 황해북도와 경계지역이다. 안악군은 원래는 버드나무 양(楊)자를 써서 양악군(楊岳郡)이라고 했다. ‘버드나무가 우거지 양산대 아래에 있는 마을’, 이런 뜻인데, 고려 초에 안악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유리한 산을 끼고 있는 편안하고 안정된 고을’이라는 뜻인데 그 산은 구월산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구월산에는 고구려 때 쌓은 구월산성이 지금도 남아있다.
▣ 김구 선생 등, 많은 민족운동가들의 활동무대였던 안악 ▣
안악군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민족운동가들의 활동무대였다.
특히 김구 선생이 안악을 중심으로 많은 일을 했는데, 김구 선생은 안악에 있는 양산(楊山)학교 교원으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북한당국도 이 양산학교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구 선생과 안악과의 관계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독립운동 사건 가운데 ‘안악 사건’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건인데, 이 때 양산학교 교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고 양산학교는 폐교되었다.
▣ 선교기지 설립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었던 안악 ▣
은률읍교회는 1893년에 세워졌다.
안악은 북장로교 선교구역이었는데 그라함 리(Graham Lee: 李吉咸) 선교사가 1889년부터 이 지역을 맡아 선교를 했다.
이 때 그라함 리 선교사를 도와 전도에 힘쓴 분이 한치순(韓致淳) 조사이다.
한치순 조사는 황해도 지역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많이 세운 분인데 그 과정에서 천주교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라함 리 선교사와 한치순의 전도가 열매를 맺어 1893년에 안악군 일대에 교회들이 여럿 세워졌다.
대원면(大遠面) 가양리(可陽里)의 교동(橋洞)교회, 은홍면(銀紅面) 학산리(鶴山里)의 덕산(德山)교회, 서하면(西河面) 상촌리(上村里)의 대동촌(大同村)교회(이 교회는 張씨 집안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그리고 안악면의 안악읍교회와 평정리(坪井里)의 무석(武石)교회, 삼상교회 등이다.
북장로회선교부는 황해도 선교를 위해 황해도에 선교기지를 세우기로 하고 후보지로 황해도의 중심지인 해주와 안악과 재령을 검토했다.
안악이 후보지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교회가 왕성했기 때문이다.
북장로회선교부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1906년에 재령에 선교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는데 만일 이 때 안악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안악은 황해도 장로교회들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다.
안악읍교회는 김백영(金伯榮)이라는 전도인의 전도로 여러 사람이 믿어 시작되었다.
안악경찰서 뒤쪽에 송영기(宋榮基)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기와집이 초창기의 안악읍교회였다고 한다.
이 예배당을 흔히 ‘귀담뒤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부속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했는데 이 학교가 발전해서 안신(安新)학교가 되었다.
김구 선생의 부인인 최준례(崔遵禮)여사가 이 학교의 교사였었다.
초기에 교회 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흔들리기도 했었는데 이것을 잘 극복하고 발전했다.
▣ 순교자 정일선 목사와 김영윤 목사 ▣
초기에는 쿤스(E. W. Koons; 君禮彬) 선교사가 안악읍교회를 지도했다.
쿤스 선교사는 황해도 지역 장로교회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1913년부터는 서울 경신학교 교장으로 교육선교에 온갖 힘을 쏟다가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추방할 때 한국을 떠났다.
1918년에는 오득인(吳得仁) 목사가 부임했다.
오득인 목사는 1910년대 초기에 조사로 안악읍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하고 교회를 부흥시킨 분이다.
오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와 손을 잡고 독립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 다음에는 양석진(梁錫鎭) 목사가 안악읍교회에서 수고했다.
양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9회 졸업생(1916년)으로 주로 황해도 일대에서 목회하신 분이다.
1923년에는 정일선(丁一善)목사가 부임했다.
정일선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을 때 교회가 크게 부흥해서 교인수가 500명에 이르렀다.
안악읍교회는 경찰서 뒤에서 시작해서 신장리, 연당, 안신학교터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정일선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30년에 비석리에 석조예배당을 신축하고 정착했다
김구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뒤 모친 곽낙원(郭落園) 여사가 안악에 머물렀는데 정일선 목사를 중심으로 안악의 여러 교회들이 물심양면의 곽 여사를 도왔다.
정일선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해서 교회를 사면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담임했는데 공산정권에 반대하다가 평양감옥에 갇혔다.
1950년 9월, 공산정권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감옥에 불을 질렀는데 정일선 목사는 이 때 불길 속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8년에 김영윤(金榮潤) 목사가 부임했다.
김영윤 목사님은 경상북도 경산 출신인데. 3․1 운동 때 대구지방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평양으로 피신해서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 뒤에 목포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안악읍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8년에 졸업하고(33회),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읍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김명윤 목사는 일제강점기 말기, 해방 후 공산치하, 이렇게 어려운 때 안악읍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해방 후에 황해노회장을 지내셨고 평양신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했다.
김 목사는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공산치하에서는 공산정권에 반대해서 옥고를 여러 번 겪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해주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공산정권이 국군과 유엔군에게 쫓겨 후퇴할 때 감옥에 불을 질렀는데 김영윤 목사님은 그 때 순교했다고 하는 분도 있고, 해주 앞바다 용당포에 수장되었다고 하는 분도 있다.
▣ 안악읍교회에서 회심한 김익두 목사 ▣
안악읍교회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분이 있는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김익두(金益斗)목사가 바로 그 분이다.
김익두 목사가 태어난 곳이 바로 안악이다.
김익두 목사는 젊은 시절에 퍽 방탕하게 보내다가 친구로부터 전도를 받고 안악읍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안악읍교회에서 1900년 7월에 세례를 받았다.
김익두 목사는 신천교회를 담임하셨는데 1950년 10월 14일,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는 해방 후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총회장을 맡아 한 때 공산정권에 협력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을 순교자로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나 요즘은 이 분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추모하고 있다.
북한의 신천박물관에는 김익두 목사를 비난하는 자료들과 그를 처단했다고 하는 기록이 큼직하게 전시되어 있다.
안악읍교회의 김선량(金善亮)장로 역시 기억되어야 할 분이다..
김선량 장로님은 안악 출신으로, 안악읍교회에서 세운 안신학교를 졸업했다.
이 분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27년에 안악읍교회 장로가 되었다.
김선량 장로는 민족운동과 관계되어 여러 번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후에 월남해서 강원도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그 뒤에는 교육계에서 많은 수고를 했으며황해도지사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과 형제들이 모두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다.
안악읍교회의 주소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면 비석리였다.
비석리는 비석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은 지금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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