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여자관 옆에, 중앙회관과 함께 있었던 교회-
개성에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1901년에 세워진 개성남부감리교회(12번)와 1899년, 개성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개성북부감리교회(52)는 이미 다루었다.
그 때 미국의 감리교회가 노예사용문제로 미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로 갈라졌는데, 미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각기 한국선교를 따로 착수했고, 개성은 남감리교회가 선교를 담당했었던 대표적인 선교지라고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 윔스 선교사의 보고 ▣
개성중앙감리교회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미국남감리교회는 1896년부터 한국선교를 시작했는데 30년이 지난 다음에 30년 동안의 선교기록을 정리해서 「조선남감리교회 30년 기념보」라는 자료집을 냈는데 여기에도 개성중앙감리교회의 설립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개성중앙교회는 처음에는 개성에서 가장 작은 교회였었다. 그런데 남감리교회가 개성에 사회선교기관인 중앙회관을 세웠다. 중앙회관은 중앙전도관이라고도 했고, 중앙사회관이라고도 했다.
개성중앙감리교회는 이 중앙회관과 같이 있었다.
1923년에 남감리교회 제6회 매년회(每年會: 연회)에서 개성지방 장로사(長老司: 감리사) 윔스(C. N. Weems), 한국 이름 위임세(魏任世) 선교사는 중앙교회에 대해 이렇게 보고 했다.
중앙예배당은 초에는 3교회중 제일 적은 교회로 흥왕하였으며 더욱이 동부와 연합함으로 인하야 지금은 148명의 세례교인이 있고 또한 여자관이 신축건물로 더부러 확장됨에 따라 더욱이 강장하여 졌으며 수년 내로 시내에서 유력한 교회가 될 희망이 있습니다. 중앙예배당이 준공되는 시에는 전 시내를 위한 유력한 기관이 되겠나이다.
윔스 선교사의 보고를 통해 개성에 동부감리교회가 있었는데 중앙교회와 합병한 것을 알 수 있다.
윔스 선교사의 보고 가운데 여자관이 신축 건물로 확장되었다고 하는 것은 고려여자관을 말한다.
고려여자관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교육과 유치원 사업을 위한 기관이었는데 중앙회관 바로 옆에 있었다.
개성지방 장로사로 수고한 윔스 선교사는 1909년에 한국에 와서 1940년까지 일한 분인데 특히 유능한 학생들을 미국 유학 보내는데 힘썼다.
윔스 선교사는 집안이 모두 한국과 관계가 있다. 부인 스미스(E. E. Smith: 施律忍) 선교사는 철원 등지에서 일했다.
서울 마포경찰서 뒤에 유린사회관이 있는데 스미스 선교사가 6․25 전쟁 뒤에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하던 곳이다.
윔스 선교사의 아들 넷이 한국사 연구, 미군, 대사관 직원, 선교사로 한국과 관련해서 일을 했다.
중앙회관과 중앙교회당을 겸한 건물은 1923년 12월에 준공되어 1924년 9월에는 조선남감리회 제7회 매년회가 이 건물에서 열렸습니다.
▣ 역대 교역자들 ▣
1923년에는 앤더손(L.P.Anderson: 安至善) 선교사와 임두화(林斗華) 목사가 개성중앙감리교회를 담임했다.
앤더손 선교사는 1914년에 한국에 와서 개성과 원산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추방할 때 우리나라를 떠났다. 해방 뒤 1946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개성에서 일하다가 6․25 전쟁을 전후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임두화 목사는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한 분인데 일찍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다녔다.
한국에 와서 개성지방의 여러 분야에서 일했고 협성신학교,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1933년에 미국으로 다시 가서 그 이후에는 미국에서 일했습니다.
1924년에는 정춘수(鄭春洙)목사와 이호빈(李鎬斌) 전도사가 개성중앙감리교회를 담임했다.
정춘수 목사는 3․1 독립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으나 뒤에는 변절해서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되었다.
이호빈 전도사(1897〜1967)는 현재의 강남대학교, 처음 이름 중앙신학교를 세운 이호빈(李浩彬) 목사(1898〜1989)와는 동명이인이다.
1929년에는 전진규(全珍圭) 목사가 중앙교회를 담임했다.
전진규 목사님은 전사명(全士明) 전도인의 아들인데, 전사명 전도인은 경기도 장단, 지금 도라산역 부근에서 한의사로 일하던 분이었다.
이 분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별명이 ‘십일조 할아버지’였다.
전사명 전도인의 영향으로 많은 분들이 목사가 되었는데 이호빈 목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전진규 목사는 6․25 전쟁 당시 서울에서 목회하다가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소식이 끊어졌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이석원(李錫源) 목사가 중앙교회를 담임했다.
강원도 이천(伊川) 출생인 이석원 목사는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1916년에 좋업하고 강원도와 개성에서 목회하다가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34년에는 이경중(李敬重) 목사가 중앙교회를 담임했다.
이경중 목사는 중앙교회가 있는 개성의 고려정(高麗町)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편생활을 했고 3․1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옥고를 겪는 중에 회심하고 출옥 후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감리교 교역자가 되었다.
이 분은 교회를 담임하고, 남성병원의 원목, 중고등학교의 교장, 해방 후에는 서울 마포에 있던 형무소의 원목 등 여러 분야에서 일했다.
1937년부터는 유백희(柳百熙) 목사가 여러 해 개성중앙교회를 담임했다.
유백희 목사는 황해도 출신인데 192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남감리회대학을 졸업했다. 이 분은 개성중앙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중국 동북지역에 가서 선교활동을 했고, 8․15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건물이 남이 있을 가능성은 있는데… ▣
이곳은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고려동이 되었다. 고려동에서 해운동이 분립했고, 구려동의 일부는 만월동에, 일부는 부산동에 편입되었는데 중앙교회가 있던 곳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개성에는 옛 건물들이 많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경중 목사가 원목을 지낸 남성병원 건물도 그대로 남아서 지금은 개성인민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개성중앙교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개성중앙회관은 번화한 거리에 서 있는 3층 웅장한 석조건물이고, 고려여자관 역시 3층 건물인데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성은 멀지도 않은 곳인데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새삼 안타까워진다.
◘정정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개성중앙감리교회’ 편 처음 원고에는 1924년에 개성중앙교회를 담임했었던 이호빈(李鎬斌)전도사가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를 세운 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정재헌 형제가 그 글을 보고 두 분이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요즘, 이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에 대해 보완과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글을 올리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렇게 여러 사람의 의견과 지식과 자료를 모아서 더욱 완전한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를 만들려는데 있습니다.
정재헌 형제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그 편지 전부를 여기에 싣습니다.
21tv '유관지 박사의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라는 귀한 코너를 애용하고 있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코너의 70번째 글 "개성중앙감리교회" 내용 중 한 대목에 수정이 요한 듯 하여 삼가 편지를 띄웁니다.
당시 이용도 목사님이 방문하신/혹은 연관이 있는 몇몇 교회들에 대한 배경 이해에 박사님의 해설이 큰 도움이 되고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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