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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황해도

0097) 서흥읍(瑞興邑)교회(황해도) -중직자(重職者)의 타락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8. 25.

(0097)서흥읍교회(황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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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직자(重職者)의 타락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회-

서흥읍교회는 황해도 서흥군 서흥읍에 있었다.

북한은 1954년에 황해도를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누었는데 이때 서흥은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서흥은 황해북도의 수안군, 신계군, 평산군, 린산군, 봉산군, 연탄군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지방인데 동쪽으로는 멸악산맥(滅惡山脈), 북쪽에는 정방산맥(正方山脈)이 지나고 있다.

멸악산맥의 멸악악을 멸한다는 뜻인데, 매우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서흥에는 교회가 적었다 ▣

서흥에는 서흥강을 비롯하여 몇 개의 강과 냇물이 흐르고 있고, 서흥호(瑞興湖)도 있다.

서흥이라는 이름은 상서롭고 흥한다는 좋은 뜻인데, 고려 왕의 태()를 이 곳에 묻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이상하게 서흥에는 교회가 많지 않았다.

이 일대는 미 북장로회의 선교구역이었는데 주변의 봉산군이나 평산군, 수안군, 이런 곳들에는 교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서흥군에는 서흥읍교회를 비롯하여 신막(新幕)교회, 상석(上石)교회, 입압(立岩)교회, 대안(大安)교회, 네 개의 교회가 있었고, 문학동처소회(文學洞處所會)가 있었을 뿐이다.

처소회는 교회의 조건이나 모습을 갖추지 못한 모임을 두고 부르는 이름인 것 같다.

 

서흥읍교회에 대해서는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반대로 여러 가지 풍파를 겪은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서흥읍교회는 1903년에 세워졌다최승현(崔承賢)이라는 분이 전도해서 여러 사람이 믿게 되었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노회가 조직되기 전에는 합동공의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는데 서흥읍교회가 1903년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장로교의 제3회 합동공의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3회 합동공의회는 1903920,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는데 여기에서 서흥읍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보고 된 것을 보면 서흥읍교회는 9월 이전에 설립된 것이 확실하다.

 

서흥읍교회는 1911년에 예배당을 지었다.

 

▣ “그가 타락함으로 교회가 타격을 받아…. ▣

서흥읍교회의 초기 교인 가운데 김한복(金漢福)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 분은 나중에 서흥읍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1911년에 황해대리회는 노회에 서흥군 서흥읍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한복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으나 그가 타락함으로 교회가 타격을 받아 쇠약해졌다고 보고를 한다.

다른 기록에는 김한복이 실덕(失德)했다라고 나온다.

김한복이라는 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분은 교회에 약 주고 병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서흥읍교회를 담임했던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장덕상(張德相) 목사 한 분이 확인될 뿐이다.

장덕상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전도인 생활을 하면서 황해도의 안악군, 송화군의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다.

장덕상 목사는 서흥읍교회에서 장로생활도 하였다.

이 분은 1913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6)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장덕상 목사님은 서흥읍교회를 비롯하여 황해도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이 분은 1917년에 제주도에 가서 1년 동안 전도목사로 수고한 일도 있고 1921년에는 황해노회의 제19대 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장덕상 목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황해노회 노회장을 지낸 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목사직을 사면하였으며 다시 교회에 복귀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고, 그것이 끝이다..

그리고 서흥읍교회에 대한 기록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교회주소록에 서흥읍교회의 주소가 황해도 서흥군 서흥읍이라고만 되어 있고 그 이하는 나오지 않는다.

서흥읍은 서흥군의 중앙에 있는데 경부선이 통과하고 있다.

경부성 서흥역 부근에 서흥읍교회가 있지 않았나 짐작해볼 뿐이다.

평양과 개성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도 서흥을 통과하고 있다.

 

1903년 황해도 서흥군 서흥읍에 설립된 장로교회. 일찍이 전도인의 전도로 유성준(兪成俊)이 믿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허중현(許仲顯)이건필(李建必)이 교회에 헌신하여 점차 부흥되었다. 1911년에는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 김한복의 실덕(失德)으로 인하여 교회가 쇠퇴하였다. 그후 장덕상(張德尙) 목사의 다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교세가 회복되었다.

 

3회 합동 공의회(1903)

원은 장로 6, 조사 8, 집사 3, 총대 2, 선교사 23명이다.

소래교회 서경조장로는 성경 국문교정을 마포삼열 선교사가 해야한다는 의견에 양전백 한석진과 더불어 그 부당성을 지적하므로 주체성 있는 교회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황해도내 교회 형편은 다음과 같다.

장연군 태탄면의 태탄 교회가 점차 부흥되어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재령군 북을면의 강동촌 교회가 부흥되어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그후에 김관현을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으며,

신천군 장재동 교회가 정기영의 전도로 김병모, 홍재선, 장봉주가 믿어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그후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동군 사동 교회가 김익두의 전도로 이기화, 이영용이 믿고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김익두는 신령한 능력이 있어 기도로 병을 치유하였다. 그후 장주성이 초대 장로가 되었다.

동군 사천읍 교회가 김익두의 전도로 김석조, 최상식 등이 믿고 김익두의 사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곳은 천주교가 먼저 선교를 시작하여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가해 왔으나 김익두의 열심 있는 전도가 주효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서흥군 서흥읍 교회가 최승현의 전도로 김한복, 유성준등이 믿어 교회를 설립하였고 허중현, 이건필 등이 믿고 협력하므로 크게 부흥하였다.

이 시기의 교회 사건 중 특기할 일들은

첫째, 김익두에게 신령한 은사가 임하여 신유의 은사로 치병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이며

둘째, 천주교의 행패로 교폐 문제가 야기된 일이다. 신천읍 교회 뿐 아니라 재령군 신환포 교회에서도 천주교도들의 난행으로 교인들이 곤욕을 당하였다.

셋째, 곡산군 도리동 교회의 김자관은 임종시에 일금 100원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교회는 이를 전도비로 사용하며 큰 부흥의 밑거름이 된 일들이다.

 

제5회 독록회(1911. 9. 21 대구남문외교회)

황해 대리회가 노회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일 낮 성경 공부를 각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2. 1911년에 책벌교인이 188, 출교 교인이 33, 해벌 교인이 38명이다.

3. 5개 처에 교회를 신설한 것 등이다.

책벌 교인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음주와 흡연이며, 때로는 축첩과 성수주일 위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초기 한국 교회는 교회의 기강을 잡기 위해 권징(勸懲)을 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권징을 통한 교회 기강을 확립하는 예는 찾아 볼 수 없게 된 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 해의 황해도 내 교회 형편은 다음과 같다.

안악군 안악읍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교인 500명이 모이는 대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약간의 내적 분규가 있었으나 오득인 전도사의 지혜로운 처사로 평안을 찾게 되었고, 염도선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자녀 교육에 힘쓰면서 더욱 부흥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서흥군 서흥읍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한복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으나 그가 타락함으로 교회가 타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나 장덕상 목사가 다년간 시무하면서 다시 부흥하게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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