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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황해도

(0063) 도리동(桃李洞)교회(황해도 곡산군 소재) -강이 흐르고, 나무가 많고, 꿀이 많이 생산되는 곳에 있었던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7. 5.

(0063)도리동교회(황해도곡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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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흐르고, 나무가 많고, 꿀이 많이 생산되는 곳에 있었던 교회-

복숭아나무 도, 자두나무 리, 또는 오얏나무 리, 골 동 자를 쓰는 도리동(桃李洞)교회의 이름을 풀면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가 우거진 마을에 세워진 교회가 되는데 도리동교회가 있었던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花村面) 도리동은 실제로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곡산군에는 이상하게 꽃과 관계있는 지명을 가진 곳들이 많았다.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이상향을 무릉도원이라고 하는데 곡산군에 도화면(桃花面)이 있었고, 도화면 안에는 무릉리(武陵里)가 있었다.

곡산군의 서촌면(西村面)에는 도리포리(桃李浦里)가 있었다.

이 이름을 풀면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많은 개울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한문 교사 김두호 ▣

도리동교회는 18977월에 세워졌다교회가 세워지기 2년 전에 김두호(金斗昊)라는 한문 선생이 곡산읍에서 도리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 분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그리고 한문을 가르치면서 십자가의 도를 힘써 말했다.

이 분의 전도로 여러 사람이 믿게 되었고, 이 분들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예배당을 마련했다.

교인이 20여 명이 되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초기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교회를 지도했다.

그리고 김두호 한문교사가 초기에 조사로 수고하다가 황주로 이사를 갔다.

조사(助事)는 선교사를 도와 교회 일을 담당하던 분들이다.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순회하면서 여러 교회를 돌보았는데 선교사들이 오지 않을 때는 조사들이 예배를 인도했다.

조사들 가운데 나중에 신학교육을 받고 목사가 된 분들이 많다.

 

▣ 평생을 곡산군에서 수고한 전관일 목사 ▣

1912년에 최선탁(崔善鐸) 목사가 부임했다.

최선탁 목사님은 평양 출신인데 도리동교회에서 조사생활을 했다.

그는 1912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5) 목사안수를 받고 도리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최선탁 목사는 도리동교회를 떠난 뒤에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윤동주(尹東柱) 시인이 출생하고 성장한 용정 명동촌의 명동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돌보았다.

 

1918년에 김수봉(金守鳳)목사가 부임했다.

김수봉 목사는 1913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수봉 목사가 도리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김 목사는 곡산지역 만세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고, 이 일로 옥고를 겪었다.

김수봉 목사는 원래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천곡면(泉谷面)에 있는 두대동(斗垈洞)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뒤에 그 다시 그 교회로 갔다.

 

그 후에 전관일(全觀一) 목사가 부임했다..

전관일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915년 졸업생인데(8)로 졸업했는데 평생을 거의 곡산군에서 교회들을 세우며 전도활동과 목회활동을 했다.

신학교에 가기 전에는 곡산군 안에 있는 하단리(下端里)교회생왕리(生旺里)교회문성동(文成洞)교회평촌(坪村)교회를 세우고 조사로 일했다.

1909년에는 도리동교회에서도 조사로 일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에는 잠시 수안군에서 목회를 하고, 다시 곡산군으로 돌아오셔서 신평(新坪)교회간도(間島)교회, 그리고 도리동교회를 담임했다.

 

▣ “첩을 얻은 연고로 면직하다… ▣

도리동교회는 성융(成隆)학교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운영했다.

성융학교는 1907년에 세워졌는데 설립자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와 그라함 리 선교사, 그리고 한석진 목사와 김선두(金善斗) 목사이다.

 

도리동교회의 초기 형편에 대한 자료를 보면 아무개가 첩을 얻은 연고로 면직하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대개 영수나 집사의 직분을 가진 중직(重職者)들인요, 그런 이유로 면직된 교인 가운데는 1895, 교회가 창립되기 이전부터 예수를 믿고 함께 예배를 드리던 분도 있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 교회가 초기에는 윤리생활과 치리가 아주 엄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교인들이 힘써 교회에 봉헌한 것도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김자관(金子官)이라는 분은 세상을 떠날 때 100원을 교회에 헌금했다.

교회에서는 이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전도인 한 분을 임명해서 일 년 동안 전도하게 했다.

김성학(金成學)이란 분과 노준택(盧俊澤)이라는 분은 세상을 떠날 때 1일경(一日耕: 가는데 하루가 걸리는 밭)의 밭을 교회에 바쳤다.

 

“19076월 집사 이병권(李炳權)이 순교하다. 그러나 교회는 진흥하였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병권이란 분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로 순교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 초기에는 평양의 영향 밑에 있었다 ▣

곡산군은 황해도에 속해 있지만 곡산군의 교회들은 평양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황해노회가 조직될 때도 곡산군이나 황주군, 수안군, 이런 곳의 교회들은 평양노회에 그대로 속해 있었다가 뒤늦게 황해도 동쪽에 있었던 지방들을 중심으로 황동노회가 조직될 때 비로서 황동노회 소속이 되었다.

황동노회는 1939년에 조직되었는데 감리교선교구역이었던 춘천 전도에 힘썼다.

황동노회는 해방 후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노회로 잘 알려져 있다.

도리동교회가 있었던 곳의 현재의 행정구역은 황해북도 신평군 고읍리(古邑里)이다.

북한은 1952년에 행정구역을 크게 개편할 때 곡산군의 북부지방을 떼어서 신평군을 새로 만들었다.

 

신평군 고읍리, 예전 곡산군 화촌면 도리동은 남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산림이 우거진 아름다운 곳인데 꿀이 많이 생산된다.

그리고 고추도 많이 생산된다.

목축업이 발달해서 가축을 많이 사육하고는 곳이기도 하다.

 

고읍리 동쪽에 도화동이 있는데 이곳이 도리동교회가 있었던 곳인 것 같다.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은 2006년 5월 7일, 도화동 골짜기에 근로자를 위한 5개동 규모의 휴양소가 새로 건립됐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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