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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함경도

(0049)문천읍(文川邑)교회(함남 문천군 소재) -‘관북지방 믿음의 아버지’인 전계은 목사의 헌신이 담겨 있는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6. 12.

(0049)문천읍교회(함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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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지방 믿음의 아버지인 전계은 목사의 헌신이 담겨 있는 교회-

문천은 지금은 강원도에 속해 있고 1991년에 시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함경도의 한 군()이었다.

아주 예전에는 문천을 물골이라고 했다.

남천강(南川江)이 문천에서 발원해서 동해의 원산만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 같다.

문천은 공업도시로서 큰 제련소와 물감공장이 있다.

문천의 대표적 교육기관인 문평(文坪)공업대학도 공장대학은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공장 안에 세워진 공업대학이다.

 

나는 네가 믿는 예수에게 졌다.”

문천읍교회는 1896년에 세워졌다.

원산에 선교기지를 마련하고 전도를 하던 게일(J.S. Gale) 선교사가 문천에 와서 전도했는데 문천이 고향인 전계은(全啓殷)이라는 청년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계은은 시집온 지 여러 해가 되는 아내가 아기를 낳지 못해 치성을 드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게일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의 조사인 모학수(毛學壽)를 만나 여러 문답을 나누었고 한문 성경을 받아 가지고 와서 밤을 새워 신약을 읽었다.

전계은 청년은 회심을 하게 되었고 50리 길을 왕래하며 원산 광석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향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문천읍교회이다.

전계은은 우선 가족들과 일가친지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미신을 타파하고 우상을 거부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전계은은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하려고 했다.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버지가 노발대발해서 아들의 상투를 잡고 목을 작두에 올려놓고 믿음을 버릴 것을 요구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나는 네가 믿는 예수에게 졌다. 이제부터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전계은은 1909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을 하고 문천읍교회의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문천읍교회는 1908년에 한식 건물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리고 문천군 안에 여러 교회를 세웠고 안변, 함흥, 북청 등 여러 곳에서도 전도활동을 했다.

전계은 목사는 전도를 할 때 먼 거리가 아니면 기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전도했다.

예수님이 걸어서 전도여행을 하신 것을 본받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차가 닿지 않는 오지에 있는 교인들도 빠짐없이 심방하기 위해서였다.

전 목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땀 흘리는 수고를 하도록 한 것은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하면서 논을 돌보고 밭을 가꾸는 일에 앞장섰다.

 

문천읍교회는 전계은 목사님을 빼놓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어느 교회 하면 바로 연결되는 목사들이 있다.

산정현교회하면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바로 연결되고, ‘장대현교회하면 길선주 목사가 바로 연결되고, ‘신천읍교회하면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바로 연결되는데 문천읍교회 하면 전계은 목사님이 바로 연결된다.

전계은 목사를 관북지방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전계은 목사님의 지도와 감회를 받아 큰 일을 한 기독교지도자들이 여럿 있다.

 

순교자 조희렴 목사

전계은 목사의 뒤를 이어 엄치상(嚴致相) 목사, 조희렴(曺希炎) 목사, 우동철(禹東哲) 목사, 정재면(鄭載冕) 목사 등이 문천읍교회를 담임했다.

엄치상 목사는 이십 세 전후해서 예수를 믿고 선교사들의 어학선생 겸 조사가 되어 원산 이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일에 힘썼다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안변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전계은 목사와 함께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여수에서 목회하였다.

 

조희렴 목사는 1910년대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캐나다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다.

목사 안수를 캐나다에서 받았다..

그 뒤에 미국 시카고로 가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한국인 유학생 총회장과 동양인 유학생 총회장을 지냈다.

귀국해서는 함흥 YMCA 총무로 일하면서 마르다 윌손 여자신학교에서 가르쳤다.

해방 후에는 원산시장이 되었으나 공산치하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어서 사임하고 원산 남부교회를 설립했다.

공산정권은 조희렴 목사를 친영미파(親英美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여기고 주목하고 있었다.

조희렴 목사님은 625 전쟁 당시 UN군이 원산에 상륙할 무렵 공산군에게 끌려가 새벽에 원산형무소 축사(畜舍) 옆에서 총에 맞아 순교했다.

이 날 새벽 공산정권은 원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300여 명을 근처 야산으로 끌고 가서 집단학살했다.

 

문천의 중앙에 있었던 교회

문천읍교회의 주소는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옥평리(玉平里)였는데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강원도 문천시 옥평동이다.

문천읍교회가 있었던 옥평리는 평야지대이다.

옥평리라는 이름은 옥녀봉 밑에 있는 평야 마을이라는 뜻으로서 문천시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강원선 철로가 이 마을을 지난다.

강원선은 강원도 평강과 함경남도 고원군을 연결하는 철로로서, 강원선 철로의 역들 가운데 옥평역이 있는데 여기에서 고암역으로 가는 지선 철로가 갈라진다.

앞에서 말한 남천강이 옥평동을 지나 원산만으로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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