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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함경도

(0041) 청진중앙교회 -초기에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섬기던 교회 -

by 산종 유관지 2023. 5. 29.

(0041)청진중앙교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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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은 함경북도의 도 인민정부 소재지(북에서는 도소재지라고 한다)이다.

남한의 를 북에서는 구역이라고 하는데 청진에는 일곱 개의 구역이 있다.(그 가운데 는 남의 경상북도 포항시와 이름이 같은 포항구역도 있다.)

청진은 1908년에 개항된 항구도시로서 원산과 더불어 동해안의 이대 항구 가운데 하나이다.

해상교통과 함께 철도교통, 도로교통이 편리한 교통의 요지이다.

그리고 청진은 지금은 탈북민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의 교회들이 있었던 청진

 

북한은 행정구역의 변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 없어서 어려울 때가 많은데요, 청진의 경우도 그렇다.

청진은 1963년에 직할시로 승격되었다가 1970년에 일반시가 되었고, 1977년에 다시 직할시가 되었고, 1985년에 또 일반시가 되었는데 탈북민들은 청진이 지금도 직할시라고 말한다.

청진에는 이상하게 교회가 많지 않았다.

청진은 캐나다장로회의 선교구역이었는데 청진에 장로교회는 청진중앙교회, 서부제일교회, 동부교회 셋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청진성결교회, 포항동성결교회, 나남성결교회가 있었고, 구세군 청진영문과 송평영문이 있었다.

청진에는 감리교회가 없었는데 선교지역분할협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1940년에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예전에는 선교사들이 선교의 중심이 되는 도시, 지금말로 하면 게이트시티(Gate City: 관문도시)들을 선정해서 선교기지(mission station)를 설립했다.

이 선교기지가 설치된 도시들이 교회가 많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전도가 행해졌는데 청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청진 남쪽의 성진(지금의 김책시), 더 남쪽인 함흥, 그리고 북쪽의 회령에 선교기지가 설치되었다.

청진은 늦게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이어서 선교기지를 설치할 때 제외된 것 같다.

 

용정 선교의 중심인물 바커 선교사

청진중앙교회는 1898년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청진중앙교회를 섬겼다.

바커(A.H Baker:朴傑)) 선교사, 맥도널드(D.A. Mcdonald), 레이시(J.V. Lacy)가 그들이다.

그 가운데 바커 선교사는 회령을 중심으로 함경북도 북부 지역에 선교활동을 하다가 중국 동북지역 용정에 가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용정에 세워진 용정중앙교회, 동산교회, 명신여학교, 제동병원에는 바커 선교사의 땀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정에 가면 영국덕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커 선교사는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용정은 민족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영국덕이는 용정 중심의 민족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성국 목사

1918년부터 3년 간은 강두송(姜斗松) 목사가 청진중앙교회를 섬겼다.

강두송 목사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데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주로 청진에서 목회하였다.

강두송 목사는 1940년 이후에는 포항동에 있었던 청진서부교회를 담임했다.

강두송 목사가 청진중앙교회를 섬길 때 최수성(崔壽成)이라는 분이 장로로 있었는데 최 장로는 자신의 재산을 헌납해서 교회당을 새로 짓는 일에 앞장 섰다.

1938년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이성국(李成國) 목사가 청진중앙교회를 담임하였다.

이성국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국 동북지역, 지금 연변지역에 가서 은진중학 교목을 지내고 동산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2년까지는 동만노회 노회장을 하였다.

이성국 목사가 담임하고 있을 때 청진중앙교회에 장로님이 다섯 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회 규모가 퍽 컸던 것 같다.

이성국 목사는 월남하여서 경남 지역과 서울에서 목회하시다가 1966년에 하늘나라로 갔다.

이성국 목사의 아들인 이선용(李善用) 목사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1회 졸업생인데 전남 구례에서 목회하시다가 625 당시 빨치산에게 순교당했다.

이선용 목사의 아들(이성국 목사의 손자)인 이영찬 목사는 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을 지냈다.

이성국 목사는 평안도에서 태어났는데 주로 함경도 지역에서 목회하였다.

장로교는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해방 이후 여럿으로 갈라졌는데 함경도 출신 교역자들이나 그 후손들은 기독교장로회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진에는 교회가 없었어요

청진중앙교회의 1938년 당시 주소는 함경북도 청진부 신암동(新岩洞)으로서, 신암동과 북성정(北星町)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현 행정구역은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구역 신암동이다.

1900년대 초반에 청진항을 개설할 때 근처에 있는 산의 바위를 깨서 썼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신암동은 청진시 동부 바닷가 중앙 지역에 있는 곳인데 청진시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청진은 원래 조그만 어촌이었는데 신암동에서 시작해서 산기슭을 따라 마을들이 들어서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청진중앙교회는 수성동(輸城洞)에 지교회를 세웠다.

수성동은 서울로 짐을 수송하던 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청진에서는 탈북민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청진에서 온 탈북민들을 만나 청진에 있었던 교회들의 이름을 대면서 아느냐고 물으면 대개 모른다고 한다.

주소가 신암동으로 되어 있는 탈북민을 만나서 청진중앙교회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교회는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에, 틀림없이 있었다고 하니까 틀림없이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탈북민을 만난 일도 있었다.

예외로, “저는 청진시 송평(松平)구역 은정(恩情)2동에 살다가 탈북했는데, 제가 살던 곳에 교회당 건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는 탈북민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곳은 예전에는 경성군(鏡城郡) 용성면(龍城面) 농포동(農浦洞)이었고, 건물이 남아있는 그 교회는 농포동장로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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