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북지역 선교의 중심지이고 근거지-

성진교회는 함경북도 성진군에 있었는데, 성진교회는 1952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책시(金策市)로 이름이 바뀌었다.
함경북도의 남부지역에 있는 김책시는 북한의 중요한 수산기지이다.
김책(金策)은 북에서는 잘 알려진 ‘항일혁명열사’로서 김일성과 항일 빨지산 활동을 같이 한 사람이다.
그는 북한정권 수립 초기에 여러 요직을 역임했고 특히 6ㆍ25 전쟁 때 전선사령관을 지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성진을 김책시라고 이름을 바꿨다.
북에서는 김책을 기념하는 것으로 김책공업대학, 김책선박공장, 김책수산사업소,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남에는 김책공업대학이 김책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김책공업대학은 평양에 있다.
▣ 그리어슨 선교사의 활동 ▣
성진은 1898년에 개항되어 서양의 문물이 일찍 들어온 곳 항구도시이다.
함경도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구역이었는데,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들은 원산과 함흥에 이어 1901년에 성진에 선교기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리어슨(R.G. Grierson:具禮善) 선교사가 먼저 성진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성진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선교목적의 학교와 병원도 세워졌다.
성진선교의 개척자인 그리어슨 선교사는 목사이면서 의사였다.
이 분은 성진에 제동(濟東)병원을 세웠고, 또 보신(普信) 학교를 세웠다.
성진선교기지는 중국대륙 동북지역(그 때 이름 간도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 역할도 했는데 나중에는 회령(會寧)에 선교기지가 생겨 간도 선교는 회령 선교부가 담당했다.
3․1 운동 때 성진의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 성진의 만세운동은 성진 부근의 청진․길주․명천․경성 등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성진에서는 YMCA 운동과 YWCA 운동도 활발했다.
성진에서는 교회지도자들과 사회지도인사들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강학린 목사 ▣
성진교회는 1901년에 설립되었다. 성진교회는 나중에는 욱정(旭町)교회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1938년 장로교 주소록에도 욱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욱정’은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이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어학선생인 홍순국(洪淳國) 과 함께 전도하면서 이순창(李順昌)이라는 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1914년에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초기에는 그리어슨 선교사, 럽(A. F. Robb: 鄴亞力) 선교사, 로스(A. R. Ross: 魯亞力) 선교사 등이 목회를 담당했다.
성진에서 수고한 로스 선교사는 별명이 “세례 요한의 동생”이었는데 이 분은 나중에는 간도지방에서 많은 일을 했다.
한국인 교역자로는 1912년에 김영준(金永俊) 목사가 부임했다. 김영준 목사는 1910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는데(3회) 성진교회가 첫 목회지였고. 나중에는 평안도 지방에서 목회했다.
1914년에는 박창영(朴昌永) 목사가 부임했다. 박창영 목사는 성진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도 럽 선교사와 함께 일했고, 성진교회를 떠난 다음에도 이원(利原) 등 함경북도 여러 곳에서 럽 선교와 함께 일했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목사를 예전에는 “동사(同事)목사”라고 했다. 박창영 목사는 1920년대에는 시베리아 선교사로도 일했다.

그리고 1918년에 강학린(姜鶴麟) 목사가 부임해서 15년간 목회했다.
강학린 목사가 부임한 이듬해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강 목사가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이 일로 옥고를 겪었다.
강학린 목사가 성진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교회가 크게 부흥했고, 100평 규모의 교회당도 새로 지었다.
그런데 성진교회 부설인 보신학교 교사 문제로 장로 한 분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성진교회를 떠나 성진교회와 같은 지역에 성진중앙교회를 따로 세우는 일이 일어났다.
1933년에는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부임했다.
김선두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교사로 여러 해 일했고, 목사가 된 후에는 평양에서 목회를 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나가 강의하셨는데 한 때는 선천 신성학교 교장으로 수고했다.
성진교회를 떠난 다음에는 중국 동북지역 봉천(지금 이름 심양)에 가서 목회와 신학교 교수로 일했다.
김선두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39년에는 강흥수(姜興洙) 목사가 부임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 당국은 성진교회와 성진중앙교회, 그리고 행정교회를 강제로 통합했다. 이 무렵에 조승제(趙昇濟) 목사가 부임했다.
조승제 목사는 경남 사천군에서 출생해서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했으며 해방 후에는 경남과 전남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 함중노회의 중심교회 ▣
성진교회는 함중노회(咸中老會)의 중심이 되는 교회였다.
성진교회를 담임했었던 목사들 가운데 여러분이 함중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했다.
함중노회는 이름 그대로 “함경도의 중간 부분을 담당하는 노회”였는데, 함경북도의 성진․명천(明川)․길주(吉州), 함경남도의 이원(利原)․단천(端川)․삼수(三水)․갑산(甲山)에 있었던 장로교회들을 관할했다.
1925년에 함북노회에서 분립되었는데 성진교회에서 창립노회가 소집되었다.
성진교회를 담임하셨던 강학린 목사가 초대노회장과 3대․4대․5대․8대․13대 노회장을 지냈고, 강흥수 목사가 15대와 18대 노회장을 지냈다.
함중노회는 관할구역 안에 산간오지들이 많았다.
삼수(三水)․갑산(甲山) 같은 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간오지이다.
함중노회는 “특별사역자회”를 조직해서 이런 지역에 전도하는데 힘썼다.
성진교회의 주소는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 욱정이었다.
욱정은 해방 직후에 신평동(新坪洞)과 한천동(漢泉洞)으로 나뉘어졌다.
성진교회는 그 둘 가운데 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신평동은 평지이고, 한천동에는 큰 샘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과 라선특별시를 연결하는 평라선(平羅線) 철로가 김책시를 통과한다.
앞에서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성진교회는 관북지역 선교의 근거지이고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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