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군 전도의 첫 열매들 가운데 하나-
무석교회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평정리(坪井里) 무석동(武席洞)에 있었다.
평정리는 안악군의 동부지역인데, 1914년에 안악군의 평촌(坪村) 일부와 동정동(洞井洞)을 합해서 만들어졌다.
‘평정리’라는 이름은 평촌(안악읍의 옛 이름)에서 ‘평’을 따고, 동정동에서 ‘정’을 따서 만든 것이다.
무석동은 평정리의 서남부이다.
그런데 교회의 기록에는 무석동이라는 이름의 한자가 굳셀 무(武)자와 돌 석(石)자로 되어 있는데, 북한의 지명 관련 자료에는 자리 석(席)자로 되어 있다.
무석동에는 무석천(武席川)이라는 냇물이 흐르는데 무석천은 ‘쌍개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두 갈래의 개울이 합해서 흐르기 때문에 쌍개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그라함 리 선교사와 한치순 조사 ▣
안악군은 안악읍교회 편(92번)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기독교가 일찍 들어가고, 매우 왕성했고,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무석교회는 1893년에 세워졌다.
1889년에 북장로교 선교사인 그라함 리(G. Lee; 李吉咸) 목사가 안악 순회전도를 시작했다.
이 때 리 선교사를 도운 분이 한치순(韓致淳) 조사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1893년에 교회가 여럿 세워졌다.
대원면(大遠面)의 교동(橋洞)교회, 은홍면(銀紅面)의 덕산(德山)교회, 서하면(西河面)의 대동촌(大同村)교회, 안악읍교회, 삼상교회, 그리고 무석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무석교회는 안악군 전도의 첫 열매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석두(張錫斗)라는 분의 전도로 여러 사람이 믿고 이들이 오계한(吳啓漢)의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무석교회가 설립되었다.
장석두는 앞에서 이름이 나온 한치순 조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형제들과 함께 대동촌교회를 세운 분이다.
무석교회는 1907년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 때 무석교회가 세워질 때 자기 집을 예배장소를 제공한 오계한이 장로가 되었다.
무석교회를 담임했었던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1940년 당시에 윤여현(尹汝鉉) 목사가 담임했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윤여현 목사는 1934년, 제46회 황해노회 때 황해노회에 이명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 평야지대, 그리고 고분 ▣
안악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에 있었다.
기독교 민족지도자들도 많이 배출되었고, 3․1운동 때도 교회가 앞장섰다.
새로운 교육사업도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무석교회는 안악읍에 있었고, 그밖의 여러 형편을 볼 때 그런 일들에 동참했을 것이 분명하다.
무석교회가 있었던 안악군 안악읍 평정리(坪井里)의 현재 행정구역은 황해남도 안악군 평정리이고 무석동이라는 이름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평정리는 재령벌(평야)에 속해 있으며 농경지가 전체면적의 92%에 달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 가운데 안악1호무덤(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73호)과 2호 무덤(제74호)이 있다.
고구려 벽화 무덤들인데 이 무덤들이 평정리에서 가까운 대추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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