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로 유명한 곳에 세워진 교회-
겸이포중앙교회는 황해도 황주군에 있었다.
“겸이포”는 일제 강점기에 “와다나베 겐지”라는 일본 군인이 자기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와다나베 겐지’를 한자로는 겸이(兼二)라고 적는데 여기에 포구이니까 “포”자를 붙여서 겸이포가 된 것이다.
일본의 미쓰비시 재벌이 1918년에 이곳에 겸이포제철소를 세웠다.
이 제철소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데 지금의 이름은 황해제철련합기업소이다.
해방 이후에는 그런 이름들을 다 없애고 새 이름을 붙이는데 순 한글식 이름이 많이 등장했다.
꽃핀동, 네길동, 새마을동, 새살림동, 이런 이름들이었다.
▣ 3․1 운동 때 박해를 받으면서 더 왕성해지다 ▣
홍종두(洪鍾斗)를 비롯해서 열세 명이 믿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처음 이름은 형제정(兄弟井)교회였고 그 다음에 겸이포교회라고 했다가 그 뒤에 겸이포중앙교회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그라함 리(Graham Lee: 李吉咸) 선교사, 번하이슬(C. F. Bernheisel: 片夏薛) 선교사 등이 교회를 돌보았다.
이 때 일차 대전의 영향으로 겸이포제철소의 규모가 확장되었고 종업원 수가 많아짐으로 교인들도 증가했다.
겸이포중앙교회는 이 때 열두 칸 규모의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이영하 목사의 후임으로 안치호(安致濩) 목사가 부임하였다.
안치호 목사는 황주의 영풍(永豊)교회를 담임하다가 1918년에 겸이포중앙교회로 왔는데 그 해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1919년 초에 최진태(崔鎭泰) 목사가 부임했는데 그 해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교회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21년에 이기창(李基昌) 목사가 부임했고, 1924년에 이용린(李用麟) 목사가 부임했다.
이용린 목사는 겸이포중앙장로교회에 오기 전에 3․1 운동에 앞장섰다가 옥고를 겪었다.
안치호 목사․최진태 목사․이용린 목사는 평양신학교 1915년(제8회)동기동창생이다.
이용린 목사가 겸이포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교인 숫자는 장년 240명, 학생 340명이었다.
평양에 있던 몇 개 교회를 빼면 교회당 규모나 교인 숫자에서 손꼽히는 교회였다.
▣ 이승길 목사 ▣
겸이포중앙교회는 1940년에 이승길(李承吉.) 목사가 부흥하면서 더욱 크게 부임했다.
이 목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다가 7년만에 출옥했다.
이 목사는 1923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17회)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장연읍교회를 담임하면서 장로교 제25회 총회장을 지냈다.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될 때 처음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는데 끝까지 계속하지 못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승길 목사는 겸이포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정방산(正方山) 사건이라는, 독립운동과 관계된 일로 다시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출옥했다.
이승길 목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부인이 옥바라지를 아주 정성껏 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승길 목사는 해방된 뒤에도 겸이포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1948년에 월남했니다.
겸이포중앙교회의 주소는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읍 욱정이었는데 겸이포읍은 1947년에 황주군 송림면과 합해서 송림시가 되었다.
소나무가 울창한 곳이라고 해서 송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대동강을 끼고 남포특별시 대안군을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서, 황해북도의 서북쪽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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