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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077) 의주(義州)서교회 -백홍준 조사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7. 25.

(0077)의주서교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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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준 조사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

의주는 압록강을 끼고 있는 국경도시로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대로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던 곳이었다.

1907년에서 1921년까지, 의주는 평안북도의 도청소재지였다.

그런데 서쪽 지역이 점점 발전하면서 그 지역이 새로운 의주라는 뜻인 신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도청도 신의주로 옮겨졌다.

국경도시나 항구도시에는 외국의 문물이 빨리 들어오는 법인데 의주에는 기독교가 특히 빨리 들어와서 뿌리를 튼튼하게 내렸고, 한국에서 기독교가 왕성한 대표적인 지역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여러 가지 ‘최초’인 백홍준 ▣

<의주서교회>

의주서교회는 188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의주읍교회였다.

교회가 점점 부흥해서 1907년에 의주동교회가 분립해 나갔는데 이 때 이름을 의주서교회로 바꾸었다.

1938년도 조선예수교장로회 명칭 급 주소에는 교회 이름이 서교회라고만 되어 있다.

 

의주의 백홍준(白鴻俊: 1848년 의주 출생)과 세 청년이 중국 동북지역에 갔다가 그곳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그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이들 네 청년은 복음에 감화되어 1876년에 세례를 받았다.

중국 땅에서 행해지기는 했지만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이들 네 청년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성서의 한글번역에 착수했다.

나중에 서상륜(徐相崙)이라는 의주 청년이 이 일에 합세했다.

의주서교회는 이 백홍준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백홍준을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며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이고, 최초로 장로가 된 분이다.

백홍준은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목숨을 잃어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백홍준은 자기가 번역해서 출간된 성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전도를 엄하게 금했다.

백홍준은 성서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으니까 낱장으로 풀어서 한 장씩 노끈을 꼬았다.

그리고 종이를 많이 사서 나머지 성경들은 그 안에 감추고, 성경으로 꼰 노끈으로 묶어서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어서는 노끈을 풀어 다시 책으로 만들고, 그 성경들을 들고 평안북도 동북부 일대를 다니며 전도했다.

이 때 전도 받은 사람들이 의주서교회의 초기 교인이 된 것이다.

 

▣ 양실학교 ▣

의주서교회는 1905년에 양실(養實)학교를 세웠다양실학교는 의주서교회와 의주 유지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의주 최대의 사립교육기관이 되었다양실학교를 확장할 때, 공신의 후예들, 지금 말로 하면 국가유공자의 후손들이 공신을 위한 땅을 바치고, 많은 사람들이 집과 토지를 바쳤다.

최광옥(崔光玉)이라는 민족운동가가 이 학교의 교사로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양실학교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때문에 일제의 박해를 많이 받았다양실학교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1912년에 이 학교를 찾은 일이 있어서 북한당국은 이 학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의주서교회는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였다.

중국 동북지역, 경북 안동, 예전의 창성군 일부 지역, 지금의 우시군, 이렇게 여러 곳에 전도인들을 보내 전도를 하게 했다.

 

▣ ‘한국 최대의 목사 가문’ ▣

처음에는 앞에서 말한 백홍준이 조사 자격으로 교회를 돌보았다

백홍준이 감옥에서 순교한 다음에는 그의 사위인 김관근(金灌根)이 조사가 되어 교회를 돌보았다.

김관근 조사는 191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3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김관근 목사의 후손 가운데 17명이 목사가 되었다그래서 김관근 목사의 가문을 한국최대의 목사 가문이라고 하는데,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김양선(金良善) 목사님이 그의 둘째 아들이다.

김관근 조사는 1891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식 결혼식을 올린 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결혼식의 주례는 마펫 선교사가 맡았다.

 

1897년에는 베어드(W.M.Baird:裵緯良) 선교사가 교회를 지도했다.

배위량 선교사는 숭실대학을 세운 분이다.

 

1911년에는 김창건(金昌鍵) 목사가 부임했다.

김창건 목사님도 의주 분인데, 일제가 서북지방의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이라는 억지 사건을 꾸몄을 때 김창건 목사는 이에 연루되어 고생을 많이 했다..

김창건 목사는 앞에서 말한 양실학교 7대 교장을 지냈다..

 

1918년에는 김태주(金泰周) 조사가 시무했다.

 

1922년에 김영훈(金永勳) 목사가 부임했다김영훈 목사 역시 의주 분인데 앞에서 말씀드린 김관근 목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이 분은 한국장로교회에서 산동성으로 파송한 첫 선교사 세 분 가운데 한 분이다.

김영훈 목사는 붓글씨에 능했고 한때는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

 

해방되기 얼마 전부터는 홍하순(洪河順) 목사가 담임했다..

 

의주서교회의 주소는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홍서동(弘西洞)이었다홍서동은 홍예문(虹霓門) 서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홍예문은 무지개문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이 남아 있다면 의주서교회가 있던 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나 북한 문화재 목록 가운데는 의주 홍예문이 나오지 않는다이곳은 지금 의주읍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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