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흥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다수 배출하고,
해방 전과 후에 수난을 많이 겪은 교회-
철산읍교회가 있었던 철산군은 우리나라 서북쪽에 있는데, 염주군과 동림군 사이에서 철산반도를 이루고 있고, 산이 많아서 이름에 ‘산’자가 들어있지만, 그 산들이 대부분 낮고, 평야가 넓어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현재의 철산군은 염주군과 동림군 사이에 있는데, 염주군과 동림군은 해방 이후에 새로 생긴 군들이고 예전에는 용천군과 선천군 사이에 있었다.
용천, 선천,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의주, 정주, 모두 기독교가 아주 왕성하던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의주는 ‘한국기독교의 관문’, 또는 ‘한국기독교의 발원지’라고 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곳인데 이 의주를 통해서 철산에 기독교가 전해졌다.
▣ 처음에는 법도를 몰라서…▣
철산읍교회는 1897년에 세워졌다.
철산의 김경일(金敬一)이 의주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돌아와 전도를 했다. 이 분의 전도에 의해 여러 사람이 믿고 김경일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분들의 모임이라 예배가 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고, 심지어는 주일의 일자도 틀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사였던 양전백(梁甸伯)이 급히 철산에 와서 신앙과 교회에 대해 가르치고, 이어 베어드(W.M. Baird)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조직했다.
양전백 목사는 장로교 최초 일곱 목사의 한 분으로서 선천 지역 교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이다.
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숭실대학을 설립한 분이다.
처음에 장태현(張台顯), 장관선(張寬善) 두 분을 초대집사로 세웠는데, 두 분 모두 철산읍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같이 신앙생활을 한 분들로서 요즘 말로하면 개척 멤버들이다.
철산읍교회는 그 뒤 동부동에 십여 칸 기와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베어드 선교사가 교회의 기틀을 놓은 다음, 로스(Ross) 선교사를 비롯하여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교회를 지도했다.
▣ 목회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장관선 목사 ▣
공식적인 초대 담임자는 앞에서 이름이 나온 장관선 목사이다.
이 분은 철산읍교회가 있는 철산 동부동에서 태어나서 어려서 한학을 깊이 배웠다.
장관선은 김경일의 전도에 의해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철산읍교회 설립, 철산읍교회 초대 집사, 초대 장로, 그리고 조사가 되어 철산군내의 여러 교회를 설립하고 도왔다.
방만준이라는 분이 부근에 서양종교〔洋敎〕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철산까지 와서 장관선 조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즉시 묻기로 결심했다.
이 방만준의 아드님이 중국선교사인 방효원 목사, 그 아드님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국선교사로 수고하고 2014년 103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방지일 목사이다.
장관선 조사는 1909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2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철산읍교회를 담임했다.
이분은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일본 경찰은 장관선 목사를 주목하다가 105인 사건 때 장 목사님을 체포했다.
105인 사건은 1911년에 일어났는데 일본이 서북지방 민족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총독암살음모사건을 꾸몄다.
이 때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장 목사는 그 가운데에서도 심한 고초를 겪었다.
3․1운동 때 장 목사는 철산지역의 3․1 운동을 앞장서서 이끌고, 그 직후 중국동북지역으로 망명해서 서간도지역에서 교회를 지도하고,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관선 목사의 큰 아드님은 독립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둘째 아드님은 장호강(張虎岡)인데 광복군이었고 해방 후 귀국해서 한국군의 장군(예비역 준장)을 역임했다.
▣ 명신학교 ▣
장관선 목사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간 다음에는 정기정(鄭基定) 목사가 부임했고, 그 다음에는 홍승한(洪承漢) 목사, 1940년에 권연호(權連鎬) 목사가 부임했다.
철산읍교회는 1907년에 명흥(明興)학교를 설립했다.
명흥학교는 장관선 목사가 중심이 되어 설립했다. 그때 관찰사가 박승봉(朴勝鳳)이었는데 이 분이 학교설립을 많이 도와주었다. 학교에서는 부근의 성황당을 사들이기도 했다. 박승봉 관찰사는 뒤에 서울 안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
철산지역의 3․1 만세운동은 이 학교를 중심으로 의논되고 준비되었다.
철산읍교회는 1917년에는 새 교회당을 지었다. 철산읍교회는 교회를 여럿 세웠다.
원세평교회․연수교회․가도교회․철산읍중앙교회가 철산읍교회에서 세운 교회이다. 철산읍교회는 무엇보다도 수난을 많이 겪은 교회였다.
105인 사건에 이어 3․1운동 때는 명흥학교 교장인 심치규(沈致圭) 장로와 교인들이 투옥 당했다. 해방 후에는 반공운동에 앞장섰다가 공산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많이 받았다. 해방 후 공산정권이 첫 선거를 실시하는데 주일인 11월 3일을 투표일로 정했다. 교회는 맹렬하게 반대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철산 지역의 교회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철산읍교회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회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교회였다.
철산읍교회의 주소는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면 동부동 234번지였다.
이곳은 지금은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읍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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