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대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교회 -
소룡리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龍山面) 소룡리에 있었다.
소룡리는 ‘소룡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소룡산은 부근에 있는 룡악산(龍岳山)보다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 도학리교회, 학교리교회와 관계가 깊은 교회 ▣
소룡리교회는 1933년 11월 3일에 세워졌다.
1933년에 열린 제23회 평서노회의 회의록을 보면 “교회 분립 1처 결의”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때 분립이 결의된 교회가 소룡리교회인 것 같다.
그런데 1935년에 열린 제25회 평서노회 회의록에는 “교회분립 허락: 도학리교회에서 소룡리교회를 조직교회로 분립”이라는 기록이 있다. 아마 소룡리교회는 그동안 행정적으로는 도학리(道鶴里) 교회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도학리교회는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도학리에 있었다. 용강군에 있었던 교회들도 평서노회에 속해 있었다.
대동군에 학교리(鶴橋里)교회가 있었는데 학교리교회의 기록을 보면 “1938년에 소룡리교회가 분립되었다”는 것이 있다.
이 기록은 노회록에는 나오지 않는데, 소룡리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학교리교회와 관계가 깊었다.
여하튼 해방 전 평양 일대의 교회들과 관련된 자료들에는 소룡리교회는 193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온다.
▣ 이윤모 목사, 목원사순 목사 ▣
소룡리교회를 담임했었던 교역자들 가운데 두 분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분은 이윤모(李潤摸) 목사이다. 이윤모 목사는 대동군 남형제산면(南兄弟山面) 학교리에서 출생했다.
이 분의 전도로 여러 명이 믿고 장대현교회에 출석했는데, 이들이 1905년에 사는 동리에 학교리교회를 세웠다.
일부 자료에는 학교리교회가 1901년에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윤모 목사는 1913년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고 학교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일부 기록에는 이윤모 목사가 1908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학교리교회에 부임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1909년 9월에 열린 제3회 장로교 독로회(獨老會) 회의록을 보면 이윤모는 남평안대리회 장로 대표의 한 분으로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5년에 열린 제29회 평서노회 회의록을 보면 “교역자 이동”에 “이윤모 목사 소룡동교회 전임시무”라는 기록이 있다.
1942년의 노회록에는 “소룡리교회 임시목사 목원사순(木原四淳)”이라고 나온다.
‘목원사순’은 창씨개명된 이름인데, 이 분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고 평남 출신의 박사순(朴四淳)이라는 목사가 있는데 혹 그 분이 아닌가 짐작해볼 따름이다.
▣ 강량욱 목사는 소룡리교회 출신 ▣
김일성의 외종조부이고, 김일성의 초등학교시절 담임교사이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창립한 강량욱(康良煜)이 소룡리교회에 다니다가 뒤에 목사가 되었다.
강량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康敦煜) 장로의 육촌동생인데 김일성은 강양욱에 대해 ‘내가 가장 존경하고,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강씨 집안은 모두 하리교회에 다녔다. 그 때 대동군 용산면에는 교하 김씨촌에 설립된 용악리(龍岳里)교회가 있었고, 홍씨들이 중심이 된 소룡리교회가 있었고, 강씨들이 중심이 된 하리교회가 있었다. 이 세 교회는 매우 친했다.
강씨 일가는 하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강량욱만 소룡리교회에 다니면서 유년부 교사도 하고, 집사도 되고, 조사로 교회 일을 하고, 신학교에도 다녔다.
왜 강량욱은 하리교회에 다니지 않고 소룡리교회에 다녔는가 하는 것이 궁금한데, 강량욱이 젊은 시절에 경건생활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룡리교회에 출석하다가 6․25 때 피난 나와 부산에 살고 있는 분이 전해주는 말을 그대로 옮기면 “량욱이는 망나니짓을 좀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가친지들과 같은 교회에 출석하기가 거북했던 모양이다.
▣ 김기선 장로의 헌신 ▣
소룡리교회는 김기선(金基善) 장로의 수고와 헌신이 깃든 교회이다.
김기선 장로는 손정도 목사와 독립운동을 같이 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자신의 재산을 바쳐 소룡리교회를 지었다.
그 당시 그 일대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한다.
김기선 장로는 ‘소룡리교회 주일학교 교가’도 작사했는데 가사는 이렇다.
(작곡 전지영 권사)
1943년 당시 소룡리교회에는 장로가 일곱 분이 있었다.
소룡리교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소룡리 186번지 1호였다.
지금 칠골동에는 칠골교회가 있는데 칠골교회는 하리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이곳의 동북쪽에는 건국동이 있는데 건국동에는 봉수교회가 있다.
이 일대는 평양의 변두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점점 번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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