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안에 있었으며,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
이 ‘북한 옛 교회들이 이야기“에는 북한에 있었던 교회들를 소개하고 있는데 김화읍감리교회는 북한에 있었던 교회가 아니라,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었던 교회이다.
▣ 민통선 안에 있었던 교회 ▣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그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보통 휴전선이라고 말하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각기 2km씩 뒤로 물러나서 4km의 남과 북 사이에 공백지역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비무장지대(DMZ)이다.
남쪽이 2km 뒤로 물러나서 철책을 친 것이 남방한계선인데 그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한 거리에서부터 군사작전과 보안을 위해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민간인출입을 통제하는 선이 바로 민통선인데 1954년 2월에 설치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민통선 안의 여러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마을을 만들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것은 보통 민북(民北)마을이라고도 하고 통일촌이라고도 한다.
1990년대에는 민통선이 북으로 많이 올라갔다.
지금은 출입 시간은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방문목적을 말하면 출입이 가능하다.
김화군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6․25 전쟁 때 이 지역에서 싸움이 아주 치열했다.
“점령하기 힘든 곳”이란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에서는 남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으로 만들었고, 북에서는 북에 속하게 된 김화군 지역을 가지고 강원도 김화군을 만들었다.
예전 김화군의 많은 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는데 예전 김화읍이었던 지역은 남방한계선 가까운 곳의 민통선 안에 들어 있다.
▣ 윤승근, 하디 선교사, 무스 선교사 ▣
김화군에 지경대란 곳이 있는데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교통이 편한 곳이었다.
이곳에 윤승근이라는 분이 들어가서 전도를 해서 교회가 세워졌다.
1923년에는 무스(J. Robert Moose) 선교사가 담임했다.
무스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무아각(茂雅各)인데 “아각”은 야곱의 한자 표기이다.
이 분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이 분이 사는 집 앞에 나무로 된 비석을 세워줄 정도였다.
1924년에는 배기준(裵基俊) 전도사, 그 이듬해에는 김태제(金泰濟) 전도사, 1929년에는 백학신(白學信) 목사, 1930년에는 서기훈(徐琦勳) 목사가 담임했다.
백학신 목사와 서기훈 목사는 나중, 6․25 전쟁 때 강원도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공산군에게 희생당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문우형(文宇亨) 목사, 중반에는 강명석(姜明錫) 목사가 담임했다.
▣ 피터즈 선교사의 토착선교 ▣
그런데 김화읍교회는 1937년에 피터즈(Victor. W. Peters: 皮道秀) 선교사가 부흥하면서 널리 알려지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피터즈 선교사는 한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한국문화를 좋아했던 분이다.
그는 1928년에 한국에 왔는데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경기도 지역에서 일하다가 김화읍교회에 부임했는데 한국식 석조기와집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지금은 국제결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당시는 국제결혼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을 때였다.
피터즈 선교사는 한국 아내와 함께,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한국식 주택에 살면서 목회를 했다.
이 분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 성화를 많이 그렸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밑에서 슬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여인들을 한복 입은 여인들로 그렸다.
피터즈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일본 당국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할 때 한국을 떠났다.
피터즈 선교사는 2012년 9월에 미국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 한사연 목사 ▣
피터즈 선교사가 한국여인과 결혼할 때 그 결혼식의 주례를 한 분이 바로 한사연 목사이다.
한사연 목사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선비목사”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한사연 목사는 짚신을 신고 등에 성경과 찬송을 많이 짊어지고 강원도 산간오지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38선이 그어지고, 김화군이 공산당 통치 밑으로 들어가고, 박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이 월남하라고 권했다.
한 목사님은 교인들을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더 열심히 전도했다.
한사연 목사는 1946년에 김화읍교회를 떠나 김화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金城)교회를 담임하였다.
공산정권은 금성교회를 징발해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 목사는 굴복하지 않고 이웃의 교회를 빌어서 예배를 드렸다.
1950년 3월에 철원과 김화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체포되었는데 한 목사도 이 때 체포되었다.
손녀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니까 사람들 이십여 명이 밧줄에 묶여 트럭에 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익은 모습이 있어서 잘 보니 바로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할아버지!” 외치자, 한사연 목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한사연 목사는 원산으로 끌려갔다가 1956년 10월 3일 학살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사연 목사에게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셋이 전쟁 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당했다.
▣ 논밭이 되어 버리다 ▣
김화읍감리교회는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생창리(生昌里) 16번지였다.
이곳은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가 되어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이지만 1970년 초부터 주민들이 입주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현재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 논밭이 되어 있다.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생창리감리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 교인들의 일부가 “이곳은 김화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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