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포라고 부르고 있는 진남포는 북한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다.
북으로 보내는 대북협력 물자들이 대부분 남포항을 거쳐서 들어간다.
대북협력 NGO들을 비롯해서 북한을 방문하는 이들은 남포를 안내 받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곳에 북한이 자랑하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인 서해갑문이 있기 때문이다.
▣ 성결교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
진남포성결교회는 1908년 5월에 설립되었다.
성결교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는 1907년에 무교동에 설립된 중앙성결교회이다. 세워질 때 이름은 중앙복음전도관이었는데 그 뒤에 동대문으로 이전했다.
그 다음에 세워진 것이, 그러니까 성결교의 두 번째 교회가 바로 진남포성결교회이다. 세워질 때 이름은 진남포복음전도관이었다.
진남포성결교회를 세운 분은 강태온(姜泰溫) 전도사와 김혁준(金赫濬) 전도사이다. 이분들은 고향이 진남포인데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고향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당시 진남포의 인구는 1만1천3백 여 명이었는데 일본인이 3천 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진남포가 신흥항구도시이어서 전국에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진남포에는 이미 장로교와 감리교가 활발하게 전도를 하고 있었다.
강태온 전도사와 김혁준 전도사는 힘써 전도했지만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워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교회가 문을 닫은 뒤 강태온 전도사는 개성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강태온 전도사는 1914년에 성결교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한 분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철원에서 목회를 하였다.
김혁준 전도사가 1년 뒤에 다시 진남포에서 교회를 시작했지만 어려움이 여전해서 1911년에 문을 닫았다.
김혁준 전도사는 교회가 문을 닫자 교역(敎役)에서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남포성결교회에서 하나님의교회 진남포교회가▣
진남포성결교회는 1929년에 세 번째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29년에 성결교는 그 때까지 써오던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 대신에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진남포성결교회를 다시 세우기로 하고 박정훈(朴貞薰) 전도사를 파송했다.
박정훈 전도사도 진남포 출신인데 원래 구세군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다.
3년 뒤에 박정훈 전도사의 뒤를 이어 오계식(吳癸植) 목사가 부임했다.
이 때 비석리에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런데 1936년에 성결교는 제3회 총회에서 일부가 분리되어 나가는 아픔을 겪는다.
변남성(邊南星) 목사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파를 만들었는데 진남포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오계식 목사는 이에 가담했다.
진남포성결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진남포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여기에 반대하는 교인들이 개인집에서 모여 예배 드리기 시작했다.
이 분들은 진남포의 신흥리, 용정리, 비석리, 이렇게 예배 처소를 옮겨가면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처소를 옮기는 이유는 교인들이 계속해서 늘어났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교단전체가 강제해산 되었는데 이 때 진남포성결교회도 강제 폐쇄 되었다.
그 당시 진남포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천영 목사는 진남포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그러니까 네 번째로 문을 닫은 것이다.
진남포성결교회는 해방과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원래의 진남포성결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고 있던 “하나님의 교회 진남포교회”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진남포성결교회가 그 예배당을 되찾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예전 교인들이 모두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가 공산당을 박해로 또 문을 닫고 그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갈라져 나간 다음에는 오만식 전도사, 이성수 목사, 오덕삼(吳德三) 목사, 이천영 목사가 차례로 진남포성결교회를 섬겼다. 그 가운데 오덕삼 목사는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 당했다.
행상으로 위장하고 피해 다니는데 어느 교인이 알아보고 “목사님!”하고 부르는 바람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 분은 고향이 진남포 옆의 용강이다.
진남포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교회로 이탈한 오계식 목사도 해방 이후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산당은 이 땅에서 멸망한다!”▣
8ㆍ15 해방 뒤에는 박용현 목사가 부임해 왔다.
박용현 목사 부임 이후 교회는 날로 부흥되었지만 동시에 공산정권의 박해도 날로 심해졌다.
박용현 목사님은 1949년 봄에 월남했는데, 월남하기 직전에 진남포 비석리 장로교회의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교를 하면서 “공산정부가 교회를 탄압하고 있다. 공산당은 결국 이 땅에서 멸망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 예배에 교인들이 1,500명 가량 참석했는데 모두 ‘저 목사님이 무사하실까?’ 염려했다고 한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박 목사는 뒷문으로 빠져 나와 그 길로 남한으로 내려 왔다고 한다.
공산치하에서 탈출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박용현 목사가 월남 한 뒤에는 정동국 목사가 진남포성결교회를 담임했고, 그 다음에는 소식이 끊어졌다.
진남포성결교회는 여러 번 예배 처소를 옮겼다.
용정리, 비석리, 신흥리, 다시 용정리, 그 가운데에서 셋집이 아니고 교회당이 있었던 비석리 148-1이 진남포성결교회의 옛 주소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곳은 지금 평안남도 남포특급시 안에 들어 있다.
북한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리’를 몇 개씩 합해서 하나의 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비석리만은 예외로 상비석동ㆍ중비석동ㆍㆍ하비석동ㆍ문화동 이렇게 넷으로 쪼갰는데 비석리 148-1은 이 가운데 어디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진남포성결교회가 있었던 비석리는 남포갑문 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비석리에는 진남포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비석리장로교회, 진남포중앙감리교회(원래 이름 비석리감리교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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