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나 강에 숨어서 예배드리며 출발한 교회-
벽동(碧潼)이라는 이름은 이두에서 왔다고 하는데, “푸른 숲이 우거져 그늘이 지고, 강물(압록강)이 산굽이를 감돌아 흐르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벽동군은 군 전체의 85% 이상이 산지이다.
수풍호 연안인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동군은 평안북도 동북쪽 끝에 있고, 자강도와 경계지역이다. 압록강 건너편은 중국이다.
▣ 평북노회에서 삼산노회로 ▣
벽동읍교회는 1903년에 설립되었다.
벽동군에 복음이 전해져서 믿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교동(校洞)에 있는 김응주(金應周)라는 분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심하게 박해해서 이들은 산이나 강가에 숨어 예배를 드렸다.
그 다음에 정의준(鄭義俊)이라는 분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부터 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들이 이 교회를 돌보기 시작했고, 이어 큰 집을 한 채 사서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1910년에는 김병관(金炳官)이라는 분이 교회터를 기부해서 그 위에 열 칸 기와 예배당을 지었다.
초기에는 커언스(Carl E. Kearns: 桂仁秀 또는 桂仁瑞)선교사와 로스(Cyril Ross:盧世永) 선교사가 벽동읍교회를 돌보았다.
1907년에는 최봉석(崔鳳奭) 목사가 조사 직분으로 로스 선교사님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교회를 담임했다.
최봉석 조사는 1914년까지 7년 동안 벽동읍교회에서 목회했다.
1918년부터는 김석항(金碩伉) 목사가 담임했고, 1939년에는 황상호(黃尙鎬) 목사가 부임했다.
커언스 선교사는 선천선교부에 소속되어 일했는데 순회전도활동을 많이 한 분이다.
로스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1897년에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부산지역에서 일하다가 평북 선천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선교회들이 선교지역을 나누어서 선교하기로 협정을 맺을 때 경남 일원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가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스 선교사는 우리나라 북부지역에서 사역하면서 중국대륙 동북지역 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번역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부인은 의료 선교사였다.
김석항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1회로 졸업하고(1918년) 바로 벽동읍교회에 부임하였다.
벽동읍교회는 처음에는 평북노회에 속해 있었다.
벽동군과 삭주군, 창성군에 교회가 많아지자 1934년에 평북노회에서 삼산노회(三山老會)가 분립했는데 김석항 목사는 삼산노회의 초대 부서기와 6대 노회장을 지냈다.
그는 벽동읍교회 다음에는 의주로 가서 목회하였다.
▣ “형룡아, 너는 벙어리인가?”▣
초기에 벽동읍교회를 섬긴 최봉석 목사는 늘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한 분인데, 최봉석이라는 본명보다 최권능(崔權能)이라는 별명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최봉석 목사가 벽동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스물다섯 평 기와집 예배당을 마련했는데 기역 자 집이었고, 중간에 휘장을 쳐서 남자 교인과 여자 교인이 서로 보지 못하게 하였다.
최봉석 목사는 37살에 벽동읍교회에 왔는데 그 다음 해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때는 교역자들이 대개 방학 때는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일하고, 개학이 되면 신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였는데 교역자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영수와 집사들이 예배를 인도했다.
벽동에서 평양까지 500리인데 최봉석 목사는 그 길을 걸어서 오가면서 공부와 목회를 한 것이다.
벽동읍교회를 담임했었던 교역자는 아니지만 벽동과 관련해서 꼭 소개하고 싶은 분이 “한국보수신학의 기둥”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박형룡(朴亨龍) 박사이다.
박형룡 박사의 고향이 벽동이기 때문이다..
박형룡 박사는 어렸을 때 벽동읍교회에 다녔고, 교회 안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최봉석 목사가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닐 때 박형룡 박사는 선천 신성학교 학생이었다고 한다. 방학이 되면 최봉석 당시 조사와 박형룡 학생이 같이 벽동으로 가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 때도 최봉석 목사님은 사람들을 만나면 “예수 천당!” 하면서 전도했다고 한다.
그 때 박형룡 학생이 가만히 있으면 최봉석 조사는 “형룡아! 너는 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니? 벙어리인가?” 하면서 책망을 했다고 한다.
최봉석 목사가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초기에 벽동읍교회는 교인이 백여 명이었다.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벽동읍교회가 이 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교회는 계속 성장해서 교인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 당시 벽동과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벽동읍교회 안에 있던 학교는 나중에 신명(新明)학교로 발전했다.
1939년 당시에는 장로가 아홉 분 있었다.
▣ 전통신앙이 강하던 곳에 ▣
벽동읍교회의 원래 주소는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1동이었다.
벽동면이 생겼을 때 행정구역 순번을 정해서 1동, 2동하였는데 벽동읍교회가 있었던 곳이 1동이 된 것을 보면 벽동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안북도 벽동군 동주리(東柱里)이다.
동주리는 벽동군의 동북부로서 수풍호 연안이다.
주변에 동부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어서 마을 이름이 동주리가 되었는데, 자강도 우시군(雩時郡) 바로 옆이다.
우시군은 예전 벽동군의 일부였는데, 그곳은 전통신앙이 아주 강하던 곳이었다.
우시군의 ‘우’ 자는 기우제 우(雩)자로서 우시군이라는 이름 자체가 “기우제와 시제를 드리던 곳” 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지역, 다시 말해서 벽동읍교회가 있었던 지역도 전통신앙의 영향 밑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벽동읍교회가 그런 가운데에서 그렇게 왕성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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