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는 꺼리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 세워진 교회-
▣ 중화군은 어떤 곳? ▣

사룡리교회는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중화면 사룡리에 있었다.
이 중화군은 1963년에 평양시에 편입되었다가 2010년에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
우리나라의 ‘구’를 북한에서는 ‘구역’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까지 평양시 안에는 열아홉 개의 구역이 있었고 강남군․강동군․상원군․중화군, 네 개의 군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2010년에 강남군․상원군․중화군과 승호구역을 황해북도로 소속을 변경시켰다.
그 가운데 강남군은 그 다음해에 다시 평양으로 재편입이 되었다.
전에는 평양이 넓이 2,600km2, 인구 300여만 명이었는데 이들 지역을 떼어냈기 때문에 넓이나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다.
북한에서 평양시민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데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화군은 평양 - 개성, 평양 - 원산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경의선도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중화읍에는 ‘길영조(吉英祚) 중학교’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학교가 있다. 길영조는 북한 공군의 조종사인데 훈련중에 비행기가 고장 나서 추락하게 되었다. 상부에서는 비행기를 버리고 탈출하라고 지시했으나 그렇게 하면 비행기가 김일성 동상과 충돌하고 말 형편이었다. 길영조는 방향을 틀어 비행기가 동상과 충돌하는 것을 막고 죽었다.
북에서는 길영조를 ‘공화국 영웅’ 이라고 부르면서 길영조를 기념하기 위해 중화여자고등중학교를 ‘길영조중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점심을 예전에는 ‘중화’라고도 했는데 평양에서 출발해서 개성을 갈 때 중화군 쯤 오면 점심 먹을 때가 되어 이곳을 중화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절과 용이 들어간 지명 ▣
사룡리교회는 앞에서 말한 것가 같이 사룡리에 있었는데 ‘사(寺)’는 절을 뜻한다. 실제로 이 마을에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룡(龍)‘은 용(dragon)을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용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0장 1절과 2절에는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사탄이라”하는 말씀이 있다.
이렇게 교회의 입장에서는 좋은 뜻이 아닌 글자가 겹친 곳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왕성하게 전도활동을 했다.
사룡리교회는 1906년에 세워졌다. 사룡동은 사동과 고령골 마을이 합해진 곳인데 이태항(李泰恒)이라는 분이 전도해서 사동 주민들이 믿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중화읍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아무래도 멀어서 불편하니까 사동에 있는 이창실이라는 교인의 집에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해서 초가삼간 집을 사서 예배를 드리다가 1906년에 이 예배처소에서 장원리교회와 사룡리교회가 분립했다. 이 때 사룡리의 한 교인이 땅을 기부해서 네 칸짜리 예배당을 건립했다.
사룡리교회가 1906년에 세워졌다고 말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 선교사들이 주로 담임하다▣

사룡리교회가 독립하기 전,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는 그라함 리(Graham Lee) 선교사가 사룡리교회 교인들을 지도했다.
그라함 리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이길함(李吉咸)인데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를 지냈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한국기독교의 대표적 지도자인 길선주 목사가 그라함 리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라함 리 선교사는 마펫 선교사의 좋은 동역자였다. 둘은 미국 매코믹 신학교 동창이었고, 신학생 시절부터 같이 한국에 가서 전도하자고 약속했었다고 한다. 그라함 리 선교사는 건축에 능해 초기에 예배당과 선교사들의 주택을 짓는데 많은 수고를 했다. 우리는 그를 ‘건축 선교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윌리암 스왈른(William Swallen)가 사룡리교회를 지도했다.
스왈른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소안론(蘇安論)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326장 “내 죄를 회개하고서 내 주를 사랑하며”를 작사한 분이다.
제주 선교의 개척자인 이기풍 목사를 감화시켜 예수를 믿게 한 분이 바로 스왈른 선교사이다.
마펫 선교사, 그라함 리 선교사, 스왈른 선교사는 ‘평양복음화의 삼총사’라고 할 수 있다..
사룡리교회가 정식으로 성립된 후에는 조지 매큔(George McCune: 尹山溫)선교사, 클라렌스 호프만(Clarence Hoffman: 咸嘉倫), 윌리암 베어드(William Baird: 裵偉良) 선교사, 찰스 필립스(Charles Phillips: (弼立甫), 하리 힐(Harry Hill: 許一), 챨스 클라크(Charles Clack: 郭安連) 선교사가 이어가며 사룡리교회를 담임해서 시무했습니다.
이들을 도운 조사들은 김택보(金澤甫)․최상오(崔祥五)․양동찬․홍덕황․김정목(金正穆) 등이며, 교회의 행정을 도운 영수도 여러 분 있었다.
중화 일대가 평양선교부의 강한 영향 밑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사룡리교회를 담임했었던 것 같다.
한국인 교역자로는 1940년에 김동섭(金東燮) 전도사가 사룡리교회를 담임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0년 사룡리교회 교인은 80명이었고, 1922년에는 교인 90, 세례교인 30인이었다.
사룡리교회는 1920년에 학교를 지어 교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사룡리교회가 있었던 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화군 충룡리(忠龍里)이다.
사룡리가 충의리와 합하면서 행정구역 이름이 충룡리가 된 것인데 중화군의 남부지역으로 황주군과 가까운 곳이다.
충룡리의 북쪽에는 어룡저수지가 있고, 남쪽에는 대동강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곤양강이 흐르고 있다.
중화군 충룡리는 산림이 전체 면적의 79%를 차지하고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농촌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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