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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108) 대기암(大奇岩)교회(평남 중화군) -채명신 장군의 외조부가 세운 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9. 12.

(0108)대기암교회(평남중화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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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의 외조부가 세운 교회-

대기암교회는 평남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있었는데,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중화군에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사룡리교회(35), 중화읍교회(66), 건산리교회(75)를 이미 소개했다.

중화군에 있었던 교회들이 이렇게 여럿 여기에 소개 되었다는 것은 중화군에 교회들이 많았고, 교회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암리라는 이름은 마을에 물이 솟아나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박진준 장로와 채명신 장군 ▣

대기암교회는 1896년에 세워졌다.

대기암리의 박진준(朴鎭俊)을 비롯하여 주민 여섯 명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박진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대기암교회의 출발이었다.

이들은 얼마 안 있어 교회당을 지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장로교 초기 역사기록 가운데 하나인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를 보면 “1899년 중화군 군수 이완용(李完用)과 부호들이 교회를 배척하여 핍박이 크게 일어났으나 오히려 새로 들어오는 교인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신자가 힘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완용은 을사5적의 대표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대기암교회를 핍박한 이완용이 그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완용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1896년, 친러시아 세력이 득세할 때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 등을 지내다가 1897년에는 세력을 잃고 평안남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를 기록한 분이 ‘평안남도 관찰사 이완용이 대기암교회를 핍박했다’고 해야 할 것을 ‘중화군 군수 이완용’이라고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대기암교회는 박진준의 집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진준은 1903년에 대기암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박진준 장로는 토지를 교회에 기부하여 300여 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당을 건립하였고 교회를 잘 이끌었다.

이 박진준 장로가 2013년 11월에 세상을 떠난 채명신(蔡命新) 장군의 외조부이다.

채명신 장군은 외가의 신앙을 이어받아 평생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지냈다.

그는 순복음교회 장로였다.

채명신 장군은 어릴 때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겪으면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월남해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 부흥과 침체 ▣

대기암교회는 1905년에 소룡리(小龍里)와 성천리(城川里)에 지교회를 설립하고, 1906년에는 학교를 설립했다.

이 때 교회가 부흥하는 모습이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에는 “1910년부터 1912년에 이르기 까지 교회는 더욱 왕성하며 박진준, 김영화(金永華)는 토지를 교회에 기부하여 발전하기를 힘쓰며 일반교인은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아 주를 독실하게 믿으니 교회가 날로 진흥하더라. 1913년에 교인의 수가 증가하여 200여 명에 달하니라. 그 후 교회는 의연히 장성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는 교회가 침체에 빠지게 된다.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늘어나서 인원이 70명으로 떨어졌고, 학교도 폐지되었다.

3․1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더 약해졌고,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진준 장로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교인들 가운데는 타락하는 이도 있어서, 한 때는 교인이 3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가 성인 70명, 아동 65명으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 조사들 ▣

초기에는 그라함 리(Graham Lee: 李吉咸)선교사가 교회를 지도했다.

그 다음에는 조사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1904년에는 채정민(蔡廷敏)이 조사로 시무했다.

채정민은 뒤에 목사가 되었는데 채정민 목사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다.

 

1914년부터는 오능조(吳能祚)가 조사로 시무했다.

오능조는 오학수(吳學洙), 오순근(吳淳根), 이렇게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중화군에서 출생했는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닐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안도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 뒤에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공부를 했다.

목사 안수도 남만노회에서 받았고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1년에 최원탁(崔元鐸)이 조사로 시무했는데 최원탁에 대해서는 지난 번 황해도 수안군에 있었던 홀동(笏洞)교회에 대해 말할 때 그 이름이 나왔다.

 

그 뒤에 장재석(張在石) 전도사가 부임했다.

 

대기암교회가 있었던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는 1952년 행정구역 개편(군면리 대폐합) 때 평양시 강남군 상암리(上岩里)가 되었다.

강남군은 평양시에 속해 있다가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는데 다시 평양시로 편입되었다.

강남군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남포시를 바라보고 있는 곳인데 상암리는 강남군의 동부 농경지역이다.

 

대기암교회는 장로교 평양노회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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