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의 외조부가 세운 교회-
대기암교회는 평남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에 있었는데, 이 ‘북한 옛 교회들의 이야기’는 중화군에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사룡리교회(35번), 중화읍교회(66번), 건산리교회(75번)를 이미 소개했다.
중화군에 있었던 교회들이 이렇게 여럿 여기에 소개 되었다는 것은 중화군에 교회들이 많았고, 교회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암리라는 이름은 마을에 물이 솟아나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박진준 장로와 채명신 장군 ▣
대기암교회는 1896년에 세워졌다.
대기암리의 박진준(朴鎭俊)을 비롯하여 주민 여섯 명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박진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대기암교회의 출발이었다.
이들은 얼마 안 있어 교회당을 지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장로교 초기 역사기록 가운데 하나인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를 보면 “1899년 중화군 군수 이완용(李完用)과 부호들이 교회를 배척하여 핍박이 크게 일어났으나 오히려 새로 들어오는 교인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서 신자가 힘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완용은 을사5적의 대표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대기암교회를 핍박한 이완용이 그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완용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1896년, 친러시아 세력이 득세할 때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 등을 지내다가 1897년에는 세력을 잃고 평안남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를 기록한 분이 ‘평안남도 관찰사 이완용이 대기암교회를 핍박했다’고 해야 할 것을 ‘중화군 군수 이완용’이라고 잘못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대기암교회는 박진준의 집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진준은 1903년에 대기암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박진준 장로는 토지를 교회에 기부하여 300여 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당을 건립하였고 교회를 잘 이끌었다.
이 박진준 장로가 2013년 11월에 세상을 떠난 채명신(蔡命新) 장군의 외조부이다.
채명신 장군은 외가의 신앙을 이어받아 평생을 독실한 신앙인으로 지냈다.
▣ 부흥과 침체 ▣
대기암교회는 1905년에 소룡리(小龍里)와 성천리(城川里)에 지교회를 설립하고, 1906년에는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늘어나서 인원이 70명으로 떨어졌고, 학교도 폐지되었다.
▣ 조사들 ▣
초기에는 그라함 리(Graham Lee: 李吉咸)선교사가 교회를 지도했다.
채정민은 뒤에 목사가 되었는데 채정민 목사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다.
오능조는 오학수(吳學洙), 오순근(吳淳根), 이렇게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중화군에서 출생했는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닐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안도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 뒤에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공부를 했다.
목사 안수도 남만노회에서 받았고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1년에 최원탁(崔元鐸)이 조사로 시무했는데 최원탁에 대해서는 지난 번 황해도 수안군에 있었던 홀동(笏洞)교회에 대해 말할 때 그 이름이 나왔다.
대기암교회가 있었던 평안남도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는 1952년 행정구역 개편(군면리 대폐합) 때 평양시 강남군 상암리(上岩里)가 되었다.
강남군은 평양시에 속해 있다가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는데 다시 평양시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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