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113) 유신리(柳新里)감리교회(평남 대동군) -장로교가 왕성했던 지역에 있었던 감리교회-

by 산종 유관지 2023. 9. 20.

(0113)유신리감리교회(평남대동군).pdf
0.62MB

-장로교가 왕성했던 지역에 있었던 감리교회-

유신리감리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에 있었다..

한국교회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선교구역 분할제가 철저하게 실시되어서 장로교 선교구역에는 감리교가 들어가지 않았고, 반대로 감리교 선교구역에는 장로교가 들어가지 않았다.

평안남도 대동군은 미 북장로교회의 선교구역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감리교회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 대동군에 있었던 감리교회들 ▣

대동군에는 유신리감리교회 말고도 감리교회들이 여럿 있었다.

대동군 대동강면에는 사동(寺洞)감리교회가 있었고, 율리면(栗里面)에는 유신리감리교회와 홍교동(紅橋洞)기도처, 현교리(鉉橋里)감리교회, 칠산(七山)감리교회, 사통교(四通橋)감리교회가 있었다.

대동군 고평면(古平面)에는 두로도(豆老島)감리교회가 있었고, 시족면(柴足面)에는 건지리(乾芝里)감리교회, 부산면(斧山面)에는 명오동(明梧洞)감리교회가 있었다.

이상은 ‘1938년 기독교조선감리회에 속한 재산목록에 따른 것인데 대동군민회에서 발간한 대동군지(大同郡誌)를 보면 부산면에 수산리(壽山里)감리교회, 용연면(龍淵面)에 검포리(檢浦里)감리교회와 삼정(三井)감리교회가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 일찍부터 선교구역 분할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어 왔는데 이것이 완결된 것은 1909년이다.

그 때 서울과 평양과 원산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선교구역으로 삼기로 했다.

앞에서 말한 대동군의 지역들은 그 당시에는 공동선교구역인 평양에 속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안도 평양부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지역에는 장로교회들도 세워지고, 감리교회들도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는데, 그 때 이 지역이 평안남도 대동군이 되었다.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어도 이미 세워진 감리교회들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동군에도 감리교회들이 여럿 있게 되었을 것이다.

감리교회들이 여럿 있었으나 대동군에는 장로교회들이 많았고, 또 활발하게 활동했다.

 

▣ 감리교, 개 교회의 역사 정리 서둘러야 ▣

감리교 기록에 신유리감리교회의 이름이 처음 발견되는 곳은 1935년에 열린 제5회 서부연회의 연회록이다.

그러니까 공식으로는 1935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신리감리교회 부근에 역포(力浦)라는 곳이 있는데 1901년부터 감리교 기록에 여포 구역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여포구역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

그 때는 감리교의 공식적인 기록은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 여포 구역역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영어로 된 인명이나 지명은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교회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애를 먹고 있다.)

여포가 과연 역포가 잘못된 것인지, 또 유신리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알 수 없으니까 이것은 그저 이런 일도 있었다.’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1931년부터 평양 부근에 칠산(七山)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 칠산교회의 주소가 처음에는 유신리교회와 거의 비슷하다가 나중에는 달라졌다.

왜 그런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여러 번 나온 이야기인데 장로교회는 해방 전 각 교회의 역사가 교회별로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는데 감리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대신 재산관계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다.

감리교회는 각 교회 별 역사 정리를 힘써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

 

▣ 유신리감리교회 담임자들 ▣

유신리감리교회는, 1935년에는 황덕주(黃德周) 목사가 담임했다.

황덕주 목사는 1934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분인데(29) 목회는 감리교에서 하였다.

그 때는 그런 경우가 여럿 있었다.

황 목사는 처음에는 앞에서 말한 칠산교회를 담임했고, 1935년부터 신유리교회, 그 다음에는 다시 칠산교회를 담임했다.

1939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중화(中和)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해방 후 월남했다.

남한에 와서는 대전을 거쳐 공주형무소의 형목(刑牧)으로 일했다.

지금의 교도소를 그 때는 형무소라고 불렀다..

교도소 선교에 헌신하던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37년에는 안명진(安明鎭) 전도사가 부임했다.

이 안명진 전도사가 어떤 분인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1939년에 졸업하고, 해방 후 감리교로 적을 옮겨 부산과 제주와 강원도에서 목회하신 안명진 목사가 있는데 유신리교회를 담임했던 안명진 전도사와 같은 분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1939년에는 오귀린(吳貴麟) 전도사가 부임했다.

오귀린 전도사에 대해서는 1913년 생이고, 1939년부터 목회를 시작했고, 첫 목회지가 유신리감리교회였다는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해방 후에는 명관조 목사가 담임했다.

명관조 목사는 1941년에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철원 장흥교회 등을 담임했고, 해방 후에는 평양에 세워진 성화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때 유신리감리교회를 담임했다.

명 목사는 1985년에 은퇴한 뒤 장애인선교에 힘썼는데, 하늘나라에 가기 직전까지, 100세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장애인학교에서 설교했다.

 

▣ 지금은 평양 역포구역이 되었다 ▣

유신리감리교회의 예배당은 목조기와집으로 17칸 규모였다.

비교적 큰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사주택은 여섯 칸 목조기와집이었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밭을 3천 평 가까이 가지고 있었다.

 

유신리감리교회는 감리교 서부연회 평양지방에 속해 있었는데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유신리 711번지였다.

유신리라는 이름은 버드나무가 많은 고장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양시 력포구역 류현리(柳絃里)이다.

력포구역은 평양시 동남부에 있는 구역인데 1960년에 신설되었다.

류현리는 력포구역의 북부지역으로서, 사동구역과 가까운 곳이다.

 

통일선교의 모든것 유니미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