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으로 유명한 지역에 세워진 교회-
운산읍감리교회는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었는데, 운산은 고려 때에는 운주(雲州)라고 하다가 조선왕조 때 운산이 되었다.
산이 많아서 ‘산’자를 붙였다고 한다.
▣평안북도 감리교 선교의 시발점▣
운산은 예전에 금광으로 유명했다.
1895년에 미국인 모스(J. R. Moris가 조선정부와 금광채굴협약을 맺고 동양합동광업회사라는 회사를 세워 금을 캤다.
약 40년 동안 9백만 톤의 금을 캐서 1억 5천만 달러의 순이익을 벌어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산금광 때문에 재미있는 말이 하나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큰 광맥을 찾았거나 이익이 되는 일을 ‘노다지’라고 하는데 이 말이 운산금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금이 들어있는 광석이 나오면 미국인들이 ‘손대지 말라’는 뜻으로 ‘노 터치(No Touch)!’라고 했는데 한국광부들이 이 말을 ‘아, 금광석을 노다지라고 하는구나!’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금광 때문에 운산에는 기독교가 일찍 들어갔다.
금광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영향이 한국인들에게도 미쳤던 것이다.
운산에 들어간 것은 감리교였다.
운산을 보통 ‘평안북도 감리교 선교의 시발점’이라고 부른다.
감리교의 문서에 1901년부터 운산지방 이야기가 나오는데 1901년 감리교 연례보고서를 보면 운산에 33명의 교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3년 보고서에는 운산교회는 3칸이었는데 그 가격은 207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의 ‘칸〔間〕이 어느 정도 넓이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보면 대개 1.7평쯤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운산읍감리교회는 다섯 평 조금 넘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감리교는 교회들이 몇 모이면 ‘구역’이 되는데 운산읍감리교회는 처음에는 평양순회구역에 속해 있었다.
그 다음에 영변순회구역에 속했고, 1903년에 운산 구역으로 독립했다.
▣ 평안도를 사랑한 모리스 선교사 ▣
운산읍감리교회는 초기에는 모리스(C. D. Morris 慕理是) 선교사가 담당했다.
모리스 선교사는 감리교의 북한지역 전체를 책임 맡고 있었다.
모리스 선교사는 조상은 프랑스인이고, 그 자신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1901년에 한국에 와서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운산은 첩첩산중이어서 순회하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모리스 선교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모리스 선교사는 평안도 지역을 깊이 사랑한 선교사였다.
1916년에는 임지를 강원도 원주로 옮겼는데 1925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은 평안도 영변에서 가졌다.
선교25주년 기념식을 가진 다음 해 말에 강원도 동해안 일대 전도여행에 나섰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1927년 초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1906년부터 1908년까지는 박영찬(朴永瓚) 전도인이 운산읍감리교회를 지도했다.
박영찬 전도인은 191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운산을 비롯해서 희천, 태천 등 평안북도 지역에서 주로 사역했다.
한 때는 황해도에서도 일했다.
박영찬 목사는 1920년부터 3년간 다시 운산교회를 담임했다.
1909년 담임자는 김창식(金昌植) 목사였다.
김창식 목사는 감리교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분이다.
이때 김창식 목사는 영변지방 감리사로 영변 일대의 여러 교회를 돌보았다.
1910년부터 몇 해는 담임자가 없었고, 1913년에 이화백(李華伯)전도사가 부임했다.
이화백 전도사는 1917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4년부터 3년 간의 이윤영(李允榮) 전도사가 담임했다.
이윤영 목사는 해방 후에는 정치계에 투신해서 초대 국회의원으로 제헌국회가 개원할 때 기도를 하셨고, 국무총리 서리도 지낸 분이다.
1917년부터는 강신화(康信華) 목사가 담임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먼저 앞에서 나온 박영찬 목사, 그 다음에는 최창신(崔昌信) 목사, 그다음에는 박창빈 목사, 그 다음에는 오인근 목사가 담임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정봉익(鄭奉益) 목사에 이어 유종학(劉鐘鶴) 전도사가 담임했다.
유종학 목사는 6․25 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해방 뒤에는 양준택 전도사가 운산읍감리교회를 담임했다.
운산읍감리교회는 역사가 오래기도 하지만 여러 분의 교역자가 담임했는데 당시 감리교회는 파송제였다.
2년 단위로 교역자가 새로 파송을 받게 되어 있었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는데 중간 중간에 ‘미파’라는 기록도 나온다.
사정이 있어서 교역자를 파송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감리교는 당시 중부연회, 서부연회, 동부연회, 3개 연회가 있었는데 연회록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교역자 파송기록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는 노회록을 보아야 하는데 북한지역에 노회들이 많았고, 노회록이 분산되어 있어서 그것이 쉽지 않다.
▣ 조양강(삼탄천)이 흐르는 곳에 ▣
운산읍감리교회의 당시 주소는 평안북도 운산군 운산면 읍내동 30번지였다.
1938년 당시 운산읍감리교회는 22평 규모의 목조함석예배당과 13평 규모의 목사주택, 역시 13평 규모의 전도부인 주택을 갖고 있었다.
또 교회유지를 위한 논과 밭, 그리고 임야를 여러 필지 가지고 있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평안북도 운산군 구읍리(舊邑里)이다.
운산읍감리교회가 있었던 읍내동은 예전 운산군의 중심부였는데 온정리가 운산군의 새로운 읍이 되고 예전의 중심부는 구읍리가 되었다.
조양강(朝陽江)이 흐르는 곳인데, 조양강은 삼탄천이라고도 한다.
읍내동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효부비(孝婦碑)와 한천사 오현당이라는 유물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성황당을 봉건시대의 유물로 보니까 이곳의 성황당은 철거되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종교를 반대하기 위해 만든 ‘성황당’이라는 유명한 연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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