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의 재령(載寧)에는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흐르고 있다.
이 서강 기슭에 신환포라는 포구가 있다.
신환포는 ‘강이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곳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신환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활발한 포구이다.
예전부터 농산물과 수산물의 집산지였다.
북한에서는 1986년에 평안남도 남포직할시와 황해남도 은률군을 연결하는 서해갑문을 만들었는데 이 서해갑문 덕택에 신환포는 물이 많이 차 있어서 큰 배들도 드나들고 있다.
신환포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공업지대들과 뱃길로 연결되어 있다.
▣ 한치순의 수고로 세워진 교회 ▣
신환포교회는 이 포구에 1893년에 세워졌다.
신환포교회가 세워지는 데는 한치순(韓致淳)이라는 분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한치순이 평양에 갔다가 사무엘 마펫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는데 한치순은 복음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한 달을 머물면서 성경을 배웠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평양에서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신도들이 여러 곳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영언이라는 분이 재령으로 피난을 왔다.
이영언은 한치순을 만나 둘이 힘을 합해 열심히 전도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재령을 방문했다.
신환포교회는 이렇게 해서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한치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가옥을 매입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한치순은 장로가 되었는데 황해도 일대에서 열심히 전도해도 여러 교회를 세웠다. 재령군의 상거동(上巨洞)교회ㆍ 강촌교회, 안악군의 덕산(德山)교회ㆍ대동(大洞)교회, 봉산군의 당포동교회가 다 한치순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황해도는 천주교가 강한 곳이었다.
빌렘(Wilhem: 洪錫九)이라는 젊은 신부가 황해도의 천주교를 담당했다.
그런 곳에 개신교회가 설립되니까 천주교인들이 가만히 있아서 황해도 여러 곳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 마찰이 일어났다.
1901년에는 신환포에서 천주교인들이 성당을 지으면서 신환포교회 교인들에게 건축비를 요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소송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 기독교교육에 힘쓴 장홍범 목사 ▣
처음에는 마펫 선교사와 그라함 리(G. Lee) 선교사가 신환포교회를 지도했다.
그 다음에는 헌트(W.B. Hunt:韓緯廉) 선교사, 쿤스(E. Wade Koons:君芮彬), 선교사 등이 담임했다.
그 뒤를 이어 정원형(鄭元衡) 목사와 장홍범(張弘範)목사가 담임했다.
해방되기 전에는 오택윤(吳宅允) 목사가 신환포교회를 담임했다.
정원형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0회 졸업생(1917년 졸업)인데 신환포교회를 비롯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목회하였다.
정 목사는 6ㆍ25 때 월남하는 중에 옹진에서 별세하였다.
장홍범 목사는 원래 교사생활을 하던 분인데 1918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환포교회에는 1922년에 부임하였다.
이 분은 기독교교육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썼다.
장 목사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ㆍ황해노회 교육부 총무ㆍ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 대회장ㆍ장로교 총회 종교교육부장 등을 지냈고, 1933년에는 장로교 22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38년에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제로 통과시키려고 할 때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사전에 검거해서 구금했는데 이 때 장홍범 목사도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장홍범 목사는 6ㆍ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 있었는데 소식이 끊어졌다.
오택윤 목사는 장로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다.
재령에는 재령성경학교가 있었는데 오 목사는 이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오택윤 목사님은 8ㆍ15 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기독교 천하”라는 말을 듣던 재령▣
재령은 “기독교 천하”라는 말을 듣던 곳이었다.
「개벽」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황해도에 대한 한 기록을 보면 “재령은 기독교를 제하면 별로 볼 것이 없는 곳이다.
재령에서는 교육도 기독교, 상업도 기독교, 농업도 기독교, 심지어는 고리대금업자도 기독교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재령에는 장로교의 선교기지가 있었고 성경공부반이 아주 많았다.
신환포교회의 예전 주소는 황해도 재령군 서호면(西湖面) 신환포리이다.
서호면은 “서쪽에 호수가 있는 면” 이라는 뜻이다.
지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령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면 “재령은 고구려 때 이곳에 장수산성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두로 표기해서 재령이 되었다.“는 설과 ”평안한 곳이라는 뜻이다.“는 설이 있다.
재령(載寧)의 한자는 실을 재(載) 평안할 영(寧), ‘평안함을 실었다’라는 뜻인데 고려 때는 재령은 안주(安州)라고 부른 것을 보면 ‘평안한 곳’이라는 뜻으로 재령이 된 것이 맞는 것 같다.
재령은 넓은 평야가 있어서 쌀을 많이 생산하고 기후가 온화한 곳이다.
신환포교회가 있었던 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황해남도 재령군 신환포리이다.
지금의 신환포리는 예전의 신환포리보다 훨씬 넓어졌다.
주변에 있었던 작도리ㆍ무덕리ㆍ신탄리ㆍ신천군 노월면의 덕성리와 굴산리 일부를 합한 것이 지금의 신환포리이다.
신환포리는 재령군의 서북부인데 안악군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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