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095) 박천(博川)교회(평북) -이상하게 교회가 많지 않았던 박천군의 중심교회-

산종 유관지 2023. 8. 2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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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교회가 많지 않았던 박천군의 중심교회-

박천교회가 있었던 박천군은 평안북도의 남부 끝부분이고, 청천강과 대령강(大寧江)을 끼고 있고, 평야지대이고, 명주를 많이 생산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인데 특히 도로교통이 편리한 곳이고, 주변에 동쪽으로는 핵 기지로 유명한 녕변이 있고, 서쪽으로는 해방 뒤에 새로 생긴 운전군과 정주시가 있는 곳이다.

1811년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는데, 박천은 홍경래 난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홍경래는 조정에서 서북 사람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에 항거해서 난을 일으켰다.

조선왕조는 서북 사람들을 심하게 차별했는데 기독교가 이 지역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골고루 사랑하십니다하고 외치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이것이 서북지역에서 기독교가 왕성해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 남호교회(박천군의 첫 교회)의 교인이 박천교회를 세우다▣

박천교회(‘박천읍교회라고 한다. 여기서는 ‘1938년 장로교 주소록에 따라 박천교회라고 한다) 1906년에 세워졌다.

박천의 주변에는 앞에서 그 이름이 나온 정주를 비롯하여 선천, 철산 등 기독교가 왕성한 곳들이 여럿 있다.

박천 동쪽에 있는 영변도 감리교가 왕성했던 지역이었다(0022 영변 서부동교회 참조).

그런데 이상하게 박천에는 복음이 늦게 들어갔고, 교회가 많지 않았다.

1938년 당시 박천군 안에는 다른 곳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인 열두 개의 교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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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군에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는 1898년에 세워진 남호(南湖)교회이다.

남호교회 교인인 김학인(金學仁)이 전도에 힘써 여러 사람이 믿었는데 이 분들이 박천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이후 박천교회는 박천군의 중심교회가 되었다.

 

▣ 박릉학교도 세우고 ▣

박천교회의 초기 담임자들은 기록에 잘 나오지 않는다..

박천은 미 북장로회의 선교구역이었으니까 평안도 지역에서 일하던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초창기에 박천교회를 지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33년부터는 이영희(李英熙) 목사가 박천교회를 담임했다.

이영희 목사는 박천에서 멀지 않은 철산군 출신인데 평양숭실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그 뒤,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고(27) 전라남도 지역에서 목회하다가 평북노회로 옮겨 박천교회를 담임하였다.

이 분은 종교교육을 깊이 공부하셔서 여러 기독교 학교의 이사를 지냈다.

51대 평북노회장도 역임했다.

박천교회는 원래 평북노회 소속이었는데 1939년에 평북노회에서 박천과 구성을 중심으로 평동노회(平東老會)가 분립되어 박천교회도 평동노회에 속하게 되었다.

이영희 목사는 해방 뒤에 월남, 전남 지역, 경북 지역,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박천교회는 박릉(博陵)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했다.

박릉은 박천의 옛 이름이다.

 

▣ 박천 여교사 찬송가 사건 ▣

박천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이 1966년에 있었던 박천 여교사 찬송가 사건이다.

박천의 인민학교 여교사 한 분이 일요일에 학생들을 집으로 오게 해서 여러 과목을 가르치면서 찬송가도 가르쳤다고 한다.

곡조를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의 곡조로 바꾸어서 불렀다고 한다.

이 일이 발각되어서 그 여교사는 물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박천교회의 주소는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동부동 85번지였다.

이곳은 지금 박천군 박천읍이 되어 있다.

 

 

 

 

 

 

여기 소개되는 내용에 대해 수정할 것이나, 보충할 것이 있으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북한 옛 교회들 이야기”가 더 충실하고 정확한 내용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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