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강원도

(0094) 명고리(鳴皐里)감리교회(강원도 통천군) -남한과 연결된 철로가 통과하는 곳에 있었던 교회-

산종 유관지 2023. 8. 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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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연결된 철로가 통과하는 곳에 있었던 교회-

명고리감리교회는 강원도 총천군 흡곡면 명고리에 있었다.

북한 강원도 고성군(북한에도 강원도가 있고 고성군이 있다) 바로 위(북쪽)가 통천군이다.

통천군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사방으로 통한다고해서 통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통천군은 지금도 철로, 도로, 해상교통이 잘 통하고 있다.

동해북부선이라는 철로가 있다.

안변에서 출발해서 흡곡을 거쳐 양양까지 이어지는 철로인데, 이 동해북부선을 북한에서는 금강산청년선이라고 부른다.

금강산청년선이 통천군을 통과한다.

남북대화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인 2007년 5월 17일, 북한의 금강산청년역을 출발한 열차가 남한의 제진역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시험운행을 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바로 통천이다.

흡곡면의 ‘흡’자는 ‘합할 흡(翕)’자이다.

흡곡면은 원래 독립된 군이었는데 1910년에 통천군에 흡수되었다.

명고리의 ‘명’은 울 명(鳴)자이고, 고는 ‘부르는 소리 고(皐)’자로서 예전에 이 지역의 산언덕에서 학이 자주 울어서 명고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원산선교의 확대되어 설립된 교회 ▣

감리교회에는 ‘구역제도’가 있었다.

예전에는 목사가 부족해서 한 분의 목사가 여러 교회를 담임했었는데 이 여러 교회를 묶어 ‘구역’이라고 한 것이다.

명고리감리교회는 흡곡구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였는데 감리교회의 기록에 흡곡구역이라는 이름이 독립해서 등장하는 것은 1924년부터이다. 그러나 명고리감리교회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통천군은 원산의 영향 밑에 있었다. 감리교에서 1892년부터 원산선교를 시작했는데 1901년경에 남감리회가 원산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원산선교를 맡아 수고한 분이 의사이면서 목사인 하디(R. A. Hardie: 河鯉泳) 선교사이다.

하디 선교사는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아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3년에 성령의 인도로 그것을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원산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원산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원산의 감리교회가 확대되어 1908년에 회양구역과 통천구역이 생겼다.

이 통천구역에서 명고리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흡곡구역이 독립한 것이다.

 

▣ 역대 담임자들: 순교자 안봉진 목사와 현병찬 목사 ▣

1922년에는 정운희(鄭雲熙) 전도사가 명고리감리교회를 담임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23년에는 터너(V. R. Turner: 天御) 선교사와 이장욱(李章旭) 전도사가 담임했다.

터너 선교사는 1912년에 한국에 와서 원산과 개성에서 일한 분이다.

 

1925년과 그 다음 해에는 한영수라는 분이 담임했었는데 이 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는다.

 

1927년에는 담임자가 없었다.

 

1928년부터 3년간은 안봉진(安鳳鎭) 전도사가 담임했다.

일부 기록에는 안봉진 전도사가 1925년부터 명고리감리교회에서 일한 것으로 나온다.

안봉진 목사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데 일본 유학 중에 예수를 믿고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흡곡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930년에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원산과 그 일대에서 목회하다가 1937년에 장로교로 적을 옮겼다.

안 목사님은 해방 후 공산정권에 맞서서 싸우다가 6․25 사변을 전후해서 납치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안봉진 목사에 이어 1931년부터 3년간은 현병찬(玄炳讚)목사가 명고리감리교회를 담임했다.

현병찬 목사는 서울에서 출생했는데 시베리아로 망명을 했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현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강원도 북부지역과 서울에서 목회하였고 1939년부터는 줄곳 진남포에서 목회했다.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행패가 심했는데 현 목사는 소련군 책임자를 만나 능숙한 러시아어로 항의하여 행패를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현 목사님은 1950년 초에 정치보위부원에게 끌려가서 소식이 끊어졌는데 공산정권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부터 여러 해 동안, 이상하게 명고리감리교회에는 교역자가 파송되지 않았다.

 

1939년에 이봉운(李鳳雲) 전도사가 부임했다.

이봉운 전도사는 강원도 양양군에서 출생한 분인데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다.

1921년에 남감리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교역을 시작해서 회양, 안덕 등에서 일하다가

명고리교회를 담임했다.

 

▣ 주변에 경치 좋은 호수들이… ▣

<통천군 명고리 중앙 아랫쪽 파란 점이 현재의 명곡리, 우측의 호수가 동정호, 우측이 동해바다이다.> 출처 : 구글 맴

명고리감리교회의 예배당은 12칸 크기의 목조함석 건물이었고, 목사관도 목조함석집이었다.

그리고 명고리감리교회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지와 밭을 여러 필지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합하면 2,500평 정도였다.

명고리교회는 감리교 동부연회 원산지방에 속해 있었다.

 

명고리감리교회의 옛 주소는 강원도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 42번지 1호였다.

명고리라는 이름은 지금도 그래도 남아있는데 북한은 지금 면 제도가 없기 때문에 강원도 통천군 명고리가 되었다.

명고리는 소나무가 많고 양잠업이 발달한 곳이다.

 

앞에서 말한 금강산청년선이 명고리를 통과한다.

금강산청년선은 역 이름들이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통천역은 동해역이 되고, 예전의 고저역이 통천역이 되고, 예전의 장전역이 고성역이 되었는데, 명고역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남한과 연결된 철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북한의 문이 열리면 명고리감리교회가 있었던 곳을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산과 금강산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도 명고리를 통과한다.

 

명고리 주변에는 동정호(洞庭湖), 천아호(天鵝湖), 시중호(侍中湖) 등 경치 좋은 호수들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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