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090) 차련관(車輦館)교회(평북) -신사참배 가결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산종 유관지 2023. 8. 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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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가결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차련관교회는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站面) 서부동에 있었다.

차련관은 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역참은 조선 시대에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둔 숙박시설을 말한다.

시간이 꽤 걸릴 때 쓰는 ‘한참’이라는 말은 역참과 역참 사이를 이르는 말이었다.

차련관이라는 이름도 역참과 관계가 깊다.

‘차(車)’는 ‘수레 차’ 자이고, ‘련(輦)’은 ‘손수레 연’자, ‘관(館)’은 ‘객사 관’자이다.

차련관이 있었던 ‘참면’의 ‘참(站)’에는 ‘역마을’이라는 뜻이 있다.

차련관은 굉장히 번화한 곳이었던 것 같다. 예전 신문에서 ‘차련관’이라는 말을 검색해 보면 차련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독립군의 활동도 활발해서 1900년대 초기에 일본 57연대가 이곳에 주둔해서 수비와 치안을 담당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철산군청을 차련관으로 옮기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설립자 정기정 목사 ▣

차련관교회는 을사조약이 맺어져서 실질적으로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비극적인 해인 1905년에 세워졌다.

철산 출신 정기정(鄭基定)이라는 분이 철산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학암(鶴岩)교회의 조사로 있었는데, 이 분의 전도로 차련관 사람들이 여럿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들은 차련관 근처에 있는 월안(月安)교회와 동림(東林)교회에 출석하다가 신자가 점점 늘어나자 가옥을 사서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가 설립될 때 벌써 신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차련관교회의 초대 담임자는 앞에서 말한 정기청 목사이다.

이 분은 조사생활을 하며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1909년에 제2회로 졸업을 했다.

정기정 목사는 평생 철산군 일대와 정주군, 용천군 일대에서 목회를 했다.

이 분이 평안북도 일대에 세운 교회가 26개처나 된다고 한다.

정기정 목사는 1935년에 차련관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 역대 담임자들 ▣

1916년에는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부임했다. 김병농 목사는 차련관교회에 오기 전에는 전주에서 목회를 했다.

이 분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20년대 이후에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18년에는 김덕선(金德善) 목사가 부임했다. 김덕선 목사는 차련관교회를 떠난 후에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목회했다.

 

1920년에는 김관일(金貫一) 목사가 부임했다.

김관일 목사가 차련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20년 7월 16일, 김활란이 이끄는 이화 7인 전도대가 차련관에 와서 전도집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당에서 집회를 가지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밖의 운동장에 모여 밤 11시 30분까지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1924년에는 김진근(金振瑾) 목사가 부임했다.

김진근 목사는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여러 지방의 만세운동을 지도했는데 이 때문에 2년간 옥살이를 했다.

 

▣ 홍택기 목사 ▣

1932년에 홍택기(洪澤麒)목사가 부임했다.

앞의 목사들은 차련관교회에서 2,3년, 또는 3, 4년 시무했는데 홍택기 목사는 십여 년을 있었다.

홍택기 목사는 교회 규칙에 대단히 능통한 분이었다.

그런데 홍택기 목사는 차련관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1928년의 제27차 총회의 총회장으로 사회를 맡은 사람이 바로 홍택기 목사였다.

 

해방 뒤에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은 통회자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홍택기 목사는 이에 대해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애쓴 사람이나 그 고생은 다 마찬가지였다’ 고 항변했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대한 통회자복이나 권징(勸懲)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것이지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감옥에 있다가 나온 출옥성도라고 해서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맞섰다.

이런 주장 때문에 출목성도들의 재건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홍택기 목사님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어느 겨울밤에 공산당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때 홍택기 목사는 월곡(月谷)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 해방 뒤의 담임자들 ▣

해방 뒤에는 이재규 목사가 담임했다가 1948년에 월남했는데 이재규 목사는 익산 황등ㄱ회에서 목회하다가 6․25 전쟁 중 순교했다.

 

그 뒤 한순옥(韓淳玉)목사가 차련관교회를 담임했다.

한순옥 목사는 원래 모스크바 공산당대학 출신의 정예 공산주의자였다.

한순옥 목사의 아버지는 한경희(韓敬禧) 목사이었는데 한경희 목사는 1935년 북만주에서 공산당 비적들에게 순교당했다.

이 일에 충격을 받은 한순옥은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봉천(현 심양)에 있는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서 용천 양시(楊市)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차련관(車輦館)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다.

공산정권으로서는 한순옥 목사가 정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공산주의 이론에 밝았기 때문에 그가 공산주의를 공격하면 당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한순옥 목사는 공산정권에 끌려가서 소식이 끊어졌는데 장작불에 불태워져 순교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해방 당시에 차련관교회의 신자수는 50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차련관교회를 두고 ‘한국 7대교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차련관교회는 성진학원(聖進學院)이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차련관교회가 있었던 평안북도 철산군은 평안북도 중부지역의 서해안에 있는 반도인데 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다.

차련관교회가 있었던 철산군 서부동은 지금은 평안북도 철산군 철산읍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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