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1) 북한에 있었던 복음교회들 -해방 전에 북한에 여덟 개의 복음교회가 있었다-
-해방 전에 북한에 여덟 개의 복음교회가 있었다-
복음교회의 정확한 이름은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서, 1935년 12월에 창설되었는데 출발할 때의 이름은 ‘기독교조선복음교회’였다. 지금 전북지방에 이 교파에 속한 교회들이 많이 있다.
▣ 복음교회는 ‘한국적인 교회 ▣
복음교회는 한마디로 해서 ’한국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복음교회는 최태용(崔泰瑢) 목사가 중심이 되어 창설된 교파인데, 최태용 목사는 원래 장로교인이었는데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역을 하려다가 오해가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복음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창설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복음교회의 표어가 있는데,
①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②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③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이다.
처음에는 다른 교파들과 마찰이 좀 있었다. 우선 장로교의 잘 알려진 신학자나 목회자와의 충돌이 있었다.
감리교 쪽의 기록에는 “강원도 금강산 지역에서 일하던 목회자들이 최태용을 중심으로 한 무교회주의자들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대목이 몇 번 나온다. 복음교회는 지금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교파가 되었다.. 복음교회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역임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 창설자의 고향이 북한이어서 ▣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종교와 향사(享祀)요람」이라는 자료가 있다.
해방 전에 북한에 있었던 교회와 교인들의 숫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쓰이는 자료인데, 여기에 보면 1940년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가 함경북도에 여섯 개, 교역자 한 분, 교인 87명, 함경남도에 교회 둘, 교역자 한 분, 교인 13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복음교회 창설자인 최태용 목사의 고향이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인흥면(仁興面), 현재의 금야군(金野郡)이어서 초창기에 북한 지역에서 복음교회 운동이 활발했던 것이다.
최태용 목사는 1925년에는 「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잡지를 발간했고, 1928년에는 「영과 진리」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함경도와 강원도에 이 잡지의 독자들이 많았는데 최태용 목사는 복음교회를 창설하기 전에도 이 지역을 순방하며 독자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자주 가졌었다. 이것이 교회로 발전한 것이다.
▣ 함경북도의 복음교회들 ▣
1937년, 복음교회가 2회 총회를 열었을 때의 기록(1940년의 총독부 쪽 자료와는 약간 차이가 있음)을 보면 함경북도에는 명천(明川)교회와 아간(阿間)교회가 있었다.
명천교회는 주소가 함경북도 명천군 상운면 상장동(上場洞)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상우남면(上芋南面)이 정확한 지명할 것이다. 이곳은 지금 함경북도 명천군 남면이 되어 있다. 명천교회의 책임자는 서창제(徐昌濟) 전도사였고 교인 수는 61명이었다. 해방 뒤에 서울 삼각지에 삼각지 복음교회가 설립되었는데요, 서창제 목사가 삼각지복음교회를 담임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명천교회의 교인대표는 김원준 장로였다. 김원준 장로는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金連俊) 박사의 형님이다. 김연준 박사도 처음에는 복음교회 교인이었고 ‘복음교회가’를 작곡하였다.
아간교회는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阿間面) 용암동(龍巖洞)에 있었다. 아간교회는 1937년 3월에 설립되었고 책임자는 김영필(金榮弼)이라는 분이었다. 김영필은 일찍부터 「영과 진리」를 애독하던 분이었다. 아간교회의 교인은 27명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함경북도 명천군 룡암로동자구가 되어 있다. 이 지역은 탄전지대이다.
▣ 강원도의 복음교회들 ▣
현재의 북한 강원도 지역에는 장전교회와 고성교회와 봉수리교회가 있었다.
장전교회는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장전리(長箭里)에 있었고 책임자는 홍순용, 교인수는 65명이었다.
북한지역에 있었던 복음교회들 가운데 교인수가 제일 많았다. 장전교회에는 김충규, 안흥식(安興植) 두 분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1939년 기록을 보면 장전교회는 교회당이 좁아 개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무렵에 금강산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분이 복음교회 교인이 되었는데, 이 분의 손자가 연세대 부총장과 상지대 총장을 지낸 구약학자 김찬국(金燦國) 목사이다.
김찬국 목사도 처음에는 복음교회에서 많이 수고했다. 장전은 해로를 통한 금강산 관광이 실시되고 있을 때 금강산 출입항이었다.
고성교회는 주소가 강원도 고성읍이라고 되어 있다. 고성읍은 군사분계선 북쪽에 있었다.
책임자는 유동민이었고, 교인수는 14명이었다. 1936년 9월에 고성교회가 수재를 당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전국의 복음교회가 연보를 해서 교인들을 도왔다.
봉수리교회는 강원도 고성군 고성면 봉수리에 있었다. 책임자는 조복열이었고 교인수는 38명이었다.
원래 외금강교회가 있었는데 외금강교회를 장전교회, 고성교회, 봉수리교회로 나눈 것이다.
박영환 전도사가 이 세 교회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박영환 전도사도 앞에 나온 삼각지 복음교회를 잠시 담임했었다.
▣ 그 뒤에 설립된 복음교회들 ▣
1939년에는 명천에 영안교회가 설립되었다. 영안교회는 전경록(全京錄) 이라는 집사가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이 영안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의 함경북도 화성군(化成郡)을 예전에는 영안군이라고 했는데 그 일부가 명천군에 편입되었다. 그곳이 아닌가 여겨진다.
함경남도 문천에 운림교회가 있었다. 문천교회는 지동식(池東植) 목사가 담임했었다. 지동식 목사는 복음교회의 중진 지도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를 지내며 한국 신학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1940년에는 청진에 청진복음교회가 설립되었다. 청진복음교회는 청진에서 사업을 하던 박승우라는 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에서도 박승우 씨의 집에서 피난교회가 모였다.
6․25 전쟁 당시 복음교히 창설자인 최태용 목사는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복음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백남용(白南鏞) 목사가 있다.
백남용 목사의 고향은 전북 김제인데 전북지방에 복음교회가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 백남용 목사도 6․25 전쟁 때 피난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 당했다.
소설가 백도기(白道基) 목사가 백남용 목사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