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양시

(0067) 고정(高町)교회(평양 소재) - 강량욱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

산종 유관지 2023. 7. 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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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량욱 목사가 담임했었던 교회-

평양에 있었던 고정교회는 1923년에 세워졌다.

해방 전에는 이동희 목사김영로 목사정명채(鄭明采) 목사이의주 목사김인준 목사 등이 고정교회를 담임하였다.

 

▣ 김인준 목사 ▣

정명채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인데 이웃 기독교 신자 가정의 찬송소리를 듣고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정주 오산중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다.

의주 양실(養實)학교 교사로 있을 때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의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고.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출옥한 다음에 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교회의 조사생활을 시작했고, 193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했다.(25첫 목회는 삼등(三登)교회에서 했고, 1939년에 두 번째 목회지인 고정교회에 부임했다.

김인준(金仁俊) 목사는 1920년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분이다.

해방 후에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교장책임을 맡았다.

 

1946년 3월에 ‘장대현교회 3․1 만세 기념예배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 후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장대현교회에서 감사예배를 성대하게 드리려고 했다.

공산정권은 그것을 취소하고 평양역전에 모여 인민위원회가 주최하는 기념식에 참가하라고 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사전에 구금했다.

이 때 김인준 목사는 공산정권에 강경하게 맞서다가 끌려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교회 지도자들이 다수 납북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처에 분산수용되어 있었는데 수용되어 있는 집에 가끔 떡이나 고기 같은 것이 들어오곤 하였다고 한다.

‘누가 보내는 것인가?’ 궁금하게 여겼는데 김인준 목사를 비롯하여 평양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하로 숨은 목사님들이 보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인준 목사는 1950년대 초반까지는 생존해 있다가 순교당한 것이 된다.

 

▣ ‘제2의 김익두’라는 소리를 듣던 강량욱 목사 ▣

해방 뒤에는 강량욱(康良煜) 목사가 고정교회에 부임했다.

강량욱 목사는 김일성의 외종조부이고, 북한의 부주석을 지내고, 또 조선기독교도련맹(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설립한 사람이다.

강량욱은 평양 칠골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중퇴한 이유는 경제적인 형편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량욱의 일가들은 대개 칠골교회에 다녔는데 강량욱은 칠골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칠골교회 가까운 곳에 있는 소룡리(小龍里)교회에 다녔다.

소룡리교회에 다니다가 1․4 후퇴 때 피난을 와서 지금 부산에 살고 있는 연세 많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술을 좋아해서 일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량욱은 고향에 있는 창덕(彰德)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이 창덕학교에 이 년 가까이 다녔는데 강량욱이 담임교사였다. 김일성은 강량욱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당시 김일성의 부모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다. 강량욱의 집이 몹시 가난해서 이때 김일성은 비지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이 창덕학교는 지금 북한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 되어 있는데, 학교 안에 예전 창덕학교 교사를 복원해 놓았다.

김일성은 이 창덕학교에 대해서 “내가 조국에 대하여 알게 되고 애국의 넋을 키운 매우 뜻 깊은 학교”라고 말했다.

 

강량욱은 장대현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다녔고 1943년에 그 학교를 38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고정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강량욱은 부흥사 스타일의 아주 유능한 목회자였다. 지금 국내에 강량욱 목사의 설교를 들은 분들이 여럿 생존해 있는데 그 분들은 강양욱 목사가 건장한 체구에서 나오는 좋은 성대를 가지고 있었고 찬양을 잘 인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경회를 잘 인도해서 ‘사경회 목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제2의 김익두’라는 말도 들었다는 것이다.

 

▣ 정치공작대, 강량욱 목사 사택을 습격하다 ▣

김일성은 1946년 2월에 북한을 통치하기 위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서기장(실무책임자)으로 강량욱을 임명했다. 김일성이 강량욱을 택한 것은 잘 아는 사이였고, 그밖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당시 북한에서는 기독교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기독교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그 때부터 강량욱은 공산정권의 실세로서 북한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또, 조그련을 만들어서 북한의 교회를 공산정권에 예속시키는 일을 했다.

 

강량욱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정교회를 계속해서 담임하고 있었다.

이 때 남한에서 정치공작대라는 이름을 가진 무장 행동대가 평양에 들어가서 공산정권의 요인들을 습격해 나갔는데 1946년 3월 13일 밤에 강량욱의 집이 피습을 당했다. 강량욱 목사의 집은 고정교회 안에 있는 목사사택이었다.

 

정치공작대는 강량욱이 당연히 안방에서 자고 있을 줄로 알고 안방을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강량육 목사는 그 날 안방에서 자지 않고, 행랑채에서 자고 있었다. 손님 두 분이 왔는데 강량욱은 안방을 그 손님들에게 내 주었다. 그래서 그 안방에서 자던 손님 두 분 가운데 한 분은 현장에서 죽고, 한 분은 중상을 입고 2년 8개월 뒤에 죽었다. 그리고 강량욱의 큰 아들이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죽었고, 딸이 어깨에서 가슴으로 총알이 관통해서 죽었다.

부인은 머리를 다쳤고 강량욱은 팔을 다쳤다.

 

이 일을 보도한 당시 북쪽의 신문기사를 보면 “요행 죽음을 면한 작은 아들과 딸이 아버지 곁에 다가와 와들와들 떨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작은 아들이 조그련 위원장을 오래 하다가 2012년 1월에 세상을 떠난 강영섭(康永燮) 목사이다.

강영섭은 당시 열네 살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강량욱은 목사 사택을 떠나 공산당 간부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 때 강량욱의 집에 찾아온 두 분 손님은 김득호(金得鎬) 목사와 강병석(康炳錫) 목사였다. 김득호 목사는 시국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서 왔고, 강병석 목사는 강량욱의 큰 아들이 그 때 스물두 살이었는데 중매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북한에 가면 경우에 따라 가정교회를 안내 받는 일이 있다.

평양 대동강구역에 있는 옥류가정예배처소에 가면 강세영이라는 칠십 안팎의 여자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 강세영 장로가 이 때 큰 부상을 입었다가 세상을 떠난 강병석 목사의 딸이다.

강병석 목사는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들어가서 1928년에 졸업했다.(제23회) 1929년부터 평양의 서성리(西城里)교회를 담임하면서 숭실학교에 출강했었다.

사건 당시에는 일부 기록에는 중화군 초현리교회를 담임했다고 되어 있고 일부 기록에는 황주에서 목회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강세영 장로는 아버지가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하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다.

 

김득호 목사는 당시 정주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 가루개 언덕 위에 있었던 교회 ▣

고정교회의 주소는 1938년 주소록에 평양부 기림리(箕林里) 56번지 4호였다.

기림리는 지금은 일부는 평양 모란봉구역 개선동으로, 일부는 평화동으로 바뀌었다.

기림리에 ‘가루개 고개’라는 고개가 있었는데 고정교회는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정교회’에서 ‘고정‘은 이 ’가루개 고개‘를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맞은편 언덕에는 서평양감리교회가 있었는데 서평양감리교회는 박대선(朴大善)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박 목사는 1960년와 70년대에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옛 기림리 부근에 북한이 자랑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개선문이 세워져 있는데 평양을 방문할 때 그 근처를 유심히 살펴보아도 옛 모습을 도저히 그려볼 수가 없다.

너무나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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