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평안도

(0065) 송산(松山)교회(평남 대동군 소재) -김일성이 출석하던 교회-

산종 유관지 2023. 7. 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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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출석하던 교회-

북한의 통치자였던 김일성은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독실한 교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장로였고, 외가 쪽에는 목사와 장로들이 많았다.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강량욱(康良煜)은 목사로서 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을 창설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일성 자신도 교회에 다녔다.

 

▣ “나도 송산교회에 다녔다…” ▣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1권을 보면 김일성 자신이 송산교회에 다녔다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어른들이 례배당에 갈 때면 아이들도 따라 가서 례배를 보군 하였다. 신자의 대렬을 늘이려고 례배당측에서는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고 공책도 주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보는 멋에 일요일만 되면 패를 지어 송산으로 밀려 가군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동무들과 함께 가끔 송산으로 다니였다.”. 그 다음에는 나는 어머니가 례배당에 갈 때에만 송산으로 다니였다라고 하고서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껴 례배당에 다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길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그 다음에는 례배당에 다니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고달플 때 쉬려고 례배당에 갔다.” “우리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학을 가르치던 숭실중학교 출신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주위에는 교인들이 많았고 따라서 나도 교인들과의 접촉을 많이 하였다.” 이런 식으로 기록했는데, 이렇게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는 이야기를 넣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 “교인이 왕성하지라” ▣

송산교회는 김일성이 태어난 만경대에 있었는데 190031일에 세워졌다송산교회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신흥리(新興里)교회의 기도처로 세워졌다처음에 세워진 곳은 남리(南里)였기 때문에 남리교회라고 했다.

이 남리가 바로 김일성의 출생지인 만경대가 있는 곳이다.

사전에서 김일성에 대해서 찾아보면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로 나온다.

 

1909년에 고개 넘어 송산리에 여덟 칸 예배당을 짓고 이전하면서 교회 이름을 송산교회라고 했다송산리는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마을이 여섯 개가 있어서 교회가 빠른 속도로 부흥했다송산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신도가 증가함으로” “교인이 왕성한지라이런 말들이 여러 번 나온다.

1923년의 기록을 보면 교인이 특별히 왕성하다이렇게 적혀 있다.

 

설립초기에는 스왈론(W. L. Swallen: 蘇安論) 선교사가 교회를 돌보았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김성호(金聲瑚) 목사가 담임했다김성호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 송산교회에서 조사생활을 한 분이다김성호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913년 졸업생(6)이다김일성은 1912년에 송산교회 부근의 만경대에서 출생해서 5년을 살았다다섯 살이 되던 해에 봄에 강동군 봉화리로 이사를 갔으니까 1917년까지 만경대에 살면서 때때로 송산교회에 나간 것인데 그 때 교회를 담임했던 분이 김성호 목사이다.

 

▣ 김철훈 목사 ▣

1920년에 김경삼(金景三) 목사가 부임했다.

김경삼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 1916년 졸업생인데(9) 하리교회(현재의 칠골교회)에서 첫 목회를 했다.

그는 금식기도를 많이 하고 신유를 행하고,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룰 때 옥중에서 계시록을 암송했다.

1921년에는 숭실대학 설립자인 베어드(W. M. Baird: 裵偉良) 선교사가 교회를 돌보았다.

그 이후 허순(許筍)이근영(李根永)김철훈(金哲勳)김오성(金五成) 목사가 이어가며 송산교회를 담임하였다.

 

그 가운데 김철훈 목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옥고를 여러 번 겪고 끝내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되었다.

김철훈 목사는 숭실전문학교에 다니실 때 광주학생사건에 관여되어 투옥되었고, 1936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16)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에는 숭실학교 교목에 이어 용강읍교회, 송산교회, 삼성리교회를 담임했는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주기철 목사님이 담임했던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면서 공산정권에 맞서다가 공산정권에 의해 끌려가서 소식이 끊어졌는데 순교당한 것이 확실하다.

해방 후에는 이응엽(李應燁)목사가 송산교회를 담임했다.

 

▣ 송산고등농사학원(송산중학교) 이사장 김현석 장로▣

송산교회는 1921년에 열일곱 칸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했다.

이 예배당은 본당이 100평이었는데 지하에 교육관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을에 기도실을 마련해서 새벽기도회 장소로 활용했다.

그 가운데 두 마을은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교육에도 힘써서 신망학교라는 초등학교도 세우고, 송산고등농사학원을 세웠다.

송산고등농사학원은 해방 후 송산중학교가 되었다.

송산중학교 이사장은 김현석 장로였고 교장은 김형석(金亨錫) 선생이었는데 김형석 교장은 후에 월남해서 연세대학교 철학교수를 지내며 베스트셀러를 많이 냈다.

잘 알려진 함석헌(咸錫憲) 선생도 송산학교 교사를 지냈다.

 

송산학교 이사장을 지낸 순교자 김현석(金賢錫) 장로는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오른팔 역할을 한 분이다.

이 분은 평양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송산교회의 기록을 보면 1924년에 김현석은 집사로 택립(擇立)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현석 장로는 1903년에 송산리에서 출생했으니까 우리나이로 스물두 살에 집사가 된 것이다.

1934년에 장로가 되었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이에 항의해서 장로직을 사임했다.

김일성의 조부가 김현석 장로 집안의 산소를 돌보던 소작인이었는데 김현석 장로님 내외를 중매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김현석 장로 집안에서 김일성 환국 환영예배를 드렸으나 그 다음에 김일성의 행동을 보고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김현석 장로를 찾아와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김현석 장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반 김일성운동을 하다가 1947년 봄에 송산리에서 체포되어 갇혔다김현석 장로님은 625 전쟁 중에 총살당했다.

김현석 장로님의 둘째 아들인 김선혁(金善爀)이 분이 반공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그곳에서 살다가 선교사를 통해서 나한과 미국에 있는 형제들과 연결이 되었다.

이 분은 1993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이 일이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었다.

김선혁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평양에서 서울까지 47(홍성사 간)라는 책을 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송산교회는 순교자, 교육자, 민족운동가를 많이 배출했는데. 무엇보다도 목사를 많이 배출한 교회이다.

총신대 교수를 지낸 김득룡 목사, 동도교회를 오래 담임했던 최훈 목사, 윤옥경 목사, 윤옥경 목사님의 자제분인 윤인수 목사, 그밖에도 여러 목사님들이 송산교회에서 출신이다.

윤인수 목사님은 시각장애인인데 아버지가 내무서에 잡혀갔는데 면회를 갔더니 내무서원들이 반동의 새끼 왔느냐?”하고 짓밟아서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송산교회의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송산리 196번지였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평양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다.

김일성의 출생지, 이른바 “고향집”이 만경대동에 있다.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송산리, 남리, 내리, 서리를 합해서 만경대리를 만들었다가 1963년에 만경대동이 되었다.

송산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군사대학,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방대학원이 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장로교 계통의 례배당이 하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한을 방문하면 으례 만경대를 제일 먼저 안내 받는다. 만경대에 들어가려면 김일성군사대학이 보이는데 그곳이 송산교회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멀리 송산유원지가 보인다. 그곳에 외부 손님을 대접하는 송산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곳이 송산교회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식사 전에 드리는 기도가 자신도 모르게 길어지더라고 하는 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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