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청진 주변에 있었던 감리교회들 -선교구역 분할이 철폐되자, 장로교 구역인 청진 일대에 감리교가 교회들을 세우다-
-선교구역 분할이 철폐되자,
장로교 구역인 청진 일대에 감리교가 교회들을 세우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선교지역을 나누어서 선교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지켜졌다.
장로교 선교구역으로 정해진 곳에 감리교회가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반대로 감리교 선교구역에 장로교회가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어느 곳에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 지역이 감리교 선교구역으로 결정되었으면 그 장로교회는 감리교회로 교파가 바꾸어졌다.
그런데 1930년대 말에 이 선교지역 분할협정이 깨졌다.
1939년 5월에 열린 감리교 제7회 합동연회 회의록에 “이미 장로교와 감리교 구역이 철폐된 이상 중요 지역에 감리교회를 확장할 것” 라는 기록이 나온다.
▣ 김진호 목사, 청진으로 파송 받다 ▣
이 결정을 실천에 옮기려는 것인지 그 때 감리교 감독이던 정춘수(鄭春洙) 목사가 함경북도의 중심 도시인 청진에 감리교회를 설립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목회에 경험이 많은 김진호(金鎭浩) 목사를 청진에 파송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때 청진에 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이미 있었는데 교인들끼리 의견이 맞지 않고 잡음이 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정식으로 감리교회를 설립하도록 김진호 목사를 보낸 것이다.
(청진감리교회는 28번, 생기령감리교회는 36번 참고).
이번에는 경성감리교회와 주을감리교회와 어항감리교회를 소개하려고 한다.
▣ 경성(境城)감리교회 ▣
1930년대 말 이후는 흔히 한국교회의 암흑기라고 말하는 때이다.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일본 당국의 압제가 날로 심해지고, 교회 지도자들이 뜻을 굽히고 일본에 협력하는 일이 많아지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회가 꾸준히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참 감동적이다.
김진호 목사가 청진감리교회에서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데 경성의 신종악(申鍾嶽)이라는 분이 와서 “제가 사는 곳에 예배 모임이 있으니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십시오.” 부탁을 하였다.
경성은 청진시의 남쪽, 함경북도 중부 해안에 위치한 곳인데 예전에는 대단히 번성하던 곳으로 1800년대 후반부에서 1900년대 초반부까지는 함경북도의 도청소재지였다.
함경도라는 이름은 함흥과 경성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종악이란 분은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하던 분이었는데 부인이 먼저 예수를 믿고 남편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의 이름은 엘리사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종악 씨는 술과 담배를 끊고, 술ㆍ담배에 들어가던 비용을 모아 기도실을 만들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많이 받고 정신이상이 되었는데,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가운데 신종악 씨가 이 청년에게 문간방을 내주고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신종악 씨에게는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김진호 목사가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해서 경성감리교회가 공식으로 설립되었다.
경성감리교회의 첫 담임자는 한국보(韓國補) 전도사였다.
이 분은 원래 장로교 교역자로, 회령읍(會寧邑)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경성감리교회로 오게 되었다.
그 때는 교역자들이 이렇게 교파를 바꾸는 일이 있었다.
한국보 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남도 성천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가 6ㆍ25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했다.
▣ 주을감리교회 ▣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에 세워진 주을(朱乙)감리교회는 김태옥(金泰玉) 전도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분이 중국 동북지역에 살다가 주을에 와서 철공업을 하면서 전도를 했다.
김진호 목사님이 이것을 알고 힘써 1942년 2월에 정식 교회로 설립되게 했다.
김득수(金得洙) 목사가 첫 담임자였고, 그 다음에 김명수 목사가 담임했다.
주을은 행정구역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 하온포로동자구(下溫堡勞動者區)가 되어 있다.
북한은 주을온천을 1981년에 경성온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어항감리교회▣
어항(漁港)은 이름 그대로 어선들이 많이 정박하는 항구를 낀 마을인데 김진호 목사가 이곳에서 정고송이라는 청년의 집을 월세 25원에 빌려 교회를 시작했다.
어항감리교회가 있었던 곳의 현재의 행정구역 이름은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水南)구역 어항동인데 경성만을 끼고 있는 곳에 세워진 청진조선소 뒤가 어항감리교회가 있었던 수남구역 어항동이다.
▣ 「북선전도약사(北鮮傳道略史)」▣
그런 때 꾸준히 교회들이 세워졌다는 것은 참 감동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는 교회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때인데, 김진호 목사는 「북선전도약사(北鮮傳道略史)」라는 기록을 남겨 그 때의 일을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북선전도약사」에는 김진호 목사가 1940년에 청진에 가서 1947년에 그곳을 떠나기까지의 일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북선전도약사」를 보면 일제의 탄압이 심해서 김진호 목사도 여러 번 경찰에 불려 갔었고, 교회 안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고 교인들의 분쟁도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서 김진호 목사의 부인이 삯바느질을 하고 남의 빨래를 해 주어서 식생활을 해결하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더 큰 어려움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후에 찾아왔다.
김진호 목사는 「북선전도약사」에서 8․15 해방을 “사변(事變)”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보다 더 사나운 소련 군대가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니까 그럴 만도 하였을 것이다.
이 때 김진호 목사님도 50여 일 간 보안서에 구금되어 있었다.
「북선전도약사(北鮮傳道略史)」에는 북한의 공산정권이 겉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탄압하는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북한이 만든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이라는 단체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그려저 있고, 그 당시 북한지역의 감리교회들이 서부연회를 중심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모습도 알려주고 있다.
「북선전도약사(北鮮傳道略史)」의 기록 한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