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신도(薪島)교회(평북 용천군 소재) -순교자 한경희(韓敬禧) 목사의 첫 전도지-
-순교자 한경희(韓敬禧) 목사의 첫 전도지-
한반도의 서쪽 끝〔西極〕은 섬을 넣었을 때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의 서쪽 끝이다.
신도교회는 바로 그 지역에 있었다.
신도군의 ‘신’자는 섶나무 신(薪)자인데 이곳에는 갈대가 많다.
이 갈대는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의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신도군은 비단섬ㆍ조룡섬ㆍ서호앞섬ㆍ서호섬 등, 섬으로만 이뤄진 군이다.(이 점에서는 남한의 인천 옹진군이나 전라남도 신안군과 같다)
그 가운데 비단섬이 제일 큰데 비단섬은 신도ㆍ마안도(馬鞍島)ㆍ양도(洋島)ㆍ장도(長島)ㆍ말도(末島) 등 여러 섬을 제방으로 연결해서 만든 섬이다.
▣ 평북대리회의 전도회, 전도인을 파송하다▣
신도교회는 1908년에 세워졌다.
그 때 장로교는 노회가 독로회(獨老會) 하나뿐이었고 각 지역의 교회들은 대리회(代理會)가 관할했다.
평안북도의 교회들은 평북대리회가 관할했는데 평북대리회는 전도회를 조직해서 전도인들을 파송했다.
한경희(韓敬禧) 전도인이 이 지역에 와서 전도를 했는데 한 전도인은 여섯 달 전도활동을 해서 이십 여 명의 교인을 얻었다
그 결과 세워진 것이 신도교회이다.
이들이 신도교회의 창립교인들이 된 것이다.
▣ “만주의 사도 바울” 한경희 목사 ▣
“만주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한경희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 생활도 했으나 어느 전도인이 준 전도지를 읽고 회심했다.
회심한 뒤 용천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생활을 했다.
용천 구읍(舊邑)교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앞장섰고 조사가 되어 여러 교회를 돌보았다.
한경희 조사는 1910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서, 1914년에 제7회로 졸업을 했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경희 목사는 독립운동에도 앞장서서 3ㆍ1 만세운동 주도했고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해서 남만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한경희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삼원포(三原浦)교회는 남만지역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존재였다.
이 때문에 삼원포교회는 일본군대로부터 잔혹한 보복을 당했고 한경희 목사는 신의주 감옥에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한경희 목사에게는 아드님이 세 분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한순옥(韓淳玉)은 정예 공산주의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순교를 통해 변화되어 심양, 당시 이름 봉천에 있었던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한순옥 목사는 해방 후에 북한 차련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 이론에 밝아서 공산주의 모순을 지적하면 당할 사람이 없었다.
화형을 당한 것으로, 다시 말해 장작불더미 위에서 장엄하게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한경희 목사ㆍ한순옥 목사, 부자가 순교를 당했는데 한순옥 목사님의 아드님도 남한의 방송을 듣다 발각되어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대가 순교를 당한 것인데 이런 사례는 세계교회의 역사에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 황금평 개발의 현장 ▣
신도교회를 담임했었던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1940년대에 나자명(羅子明) 전도사가 신도교회를 담임했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신도교회의 주소는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 남주동(南洲洞)이었다.
1967년에 용천군에서 갈라져서 신도군이 되었다가, 1969년에 다시 용천군에 속했다가, 1988년에 다시 독립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주동은 “고을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현재의 행정구역은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노동자구이다.
갈대밭을 조성해서 비단의 원자재를 생산한다고 하여 비단섬로동자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곳은 화학섬유 원료기지로 북한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북한은 이 지역을 경제특구, 특별히 금융특구로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일대는 신압록강대교 건설, 황금평 개발 등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섬이지만 압록강의 퇴적작용 때문에 중국과 거의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