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황해도

(0052) 개성북부감리교회 -인삼을 저장하던 헛간〔삼포막(蔘圃幕)〕에서 시작된 교회-

산종 유관지 2023. 6. 1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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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을 저장하던 헛간삼포막(蔘圃幕)에서 시작된 교회-

개성북부감리교회는 190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인 콜리어(C. T. Collyer:高永福) 목사가 개성에 정착해서 선교를 했는데 콜리어 선교사는 개성 산지현(山芝峴)이란 곳의 인삼을 저장하던 헛간을 매입하여 선교기지로 사용하였다.

이 인삼을 저장하던 헛간을 줄여서 삼포막(蔘圃幕)이라고 한다.

개성북부감리교회는 이 삼포막에서 출발했다.

선교사들은 이 삼포막을 인디언 고무집(Indian Rubber House)'이라고 불렀다.

개성을 찾아오는 선교사들이 늘어나면 여기에 숙소를 더 짓고, 여기에서 진료도 하게 되어 또 늘이고, 고무줄처럼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개성북부감리교회는 19131221일에 예배당을 봉헌했는데 입구에 계단이 많았다.

 

▣ 민족대표들이 담임하다 ▣

 

개성북부감리교회는 1920년대에는 정춘수(鄭春洙)목사ㆍ임두화(林斗華) 목사ㆍ오화영(吳華英)목사ㆍ박진하(朴鎭夏) 목사가 차례로 담임했다.

이 가운데는 정춘수 목사와 오화영 목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는데 정춘수 목사는 뒤에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되었다.

오화영 목사는 625때 납북되었는데 북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이 되었고, 북한의 요인들만 안장되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두화 목사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1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개성ㆍ서울ㆍ진남포에서 일하고 1933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목회활동을 했다.

박진하 목사는 핵 기지로 잘 알려져 있는 영변 출생인데 개성, 강원도, 원산에서 목회했다.

1930년에는 장병익(張炳翼) 목사, 1931년에서 1934년까지는 이윤영(李允榮) 목사, 1935년 이후는 김종필(金鐘弼)목사(정치인 김종필 목사와는 동명이인)가 담임하였다.

 

장병익 목사는 오산학교가 있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는데 춘천에서 오래 목회했다.

 

▣ 제헌국회 개원 때 기도를 한 이윤영 목사 ▣

이윤영 목사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이윤영 목사는 1931년에서 1934년까지 개성북부감리교회를 담임하고 1935년 이후에는 평양의 대표적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를 담임했다가 친일인사들에 의해 목사직에서 파면 당했다.

이윤영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목사는 해방 후 조만식 장로와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했고 월남해서 무임소 장관, 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했다.

이 분은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제헌국회가 개회할 때 기도를 했다.

 

김종필 목사는 경기도 안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서 청소년 시절을 개성에서 보내며 공부했다.

김종필 목사는 평양과 개성에서 목회했고, 일제가 한국교회를 심하게 탄압할 때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서 북경한국인학교 교장을 지냈다.

김종필 목사는 1958년에 감리교 제8대 감독을 지냈다.

당시 감리교회는 정동파와 호헌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김종필 목사는 갈라진 감리교회를 하나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개성북부감리교회의 주소는 경기도 개성부 북본정(北本町) 489번지입니다.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은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북안동(北安洞)이다.

북안동에는 개성학생소년궁전과 송도사범대학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개성에서 회담을 갖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때는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회담을 한다.

그 자남산여관이 북안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개성북부감리교회는 74평 규모의 석조기와 예배당과 주일학교 건물, 수직실(守直室)목사관전도부인 주택을 가지고 있었고 개풍군과 장단군에 교회유지를 위한 논과 밭을 보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