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 은률읍(殷栗⾢)교회 -지금도 교회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 교회-
-지금도 교회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 교회-
‘은률’이라는 지명에서 ‘성할 은(殷)’은 광석이 풍부해서, ‘밤나무 률(栗)’은이 지역에 밤나무가 많은 률구(栗口)라는 밤나무가 많은 포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한반도의 명산 가운데 하나인 구월산은 황해도의 여러 군에 걸쳐 있는데 그 가운데 주봉(主峰)이 은률군에 있다.
▣ 독립운동가 우종서 목사 ▣
한국에 제일 먼저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이 지역에 전도해서 여러 사람이 믿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1898년에 세워진 것이 은률읍교회이다.
1912년에 우종서(禹鍾瑞) 목사가 전도목사로 은률읍교회에 부임하였다.
우종서 목사는 독립운동가로도 널리 알려진 분인데,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1910년) 졸업생이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한 분이 바로 우종서 목사인데 김구 선생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우 목사가 그 가족을 돌보아 주었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우 목사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우 목사는 일찍부터 전도생활을 시작해서 목사가 되기 이전에 황해도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 때 중국동북지역에 대한독립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있었는데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국내로 잠입해서 구월산에 숨어서 항일무장운동을 했다.
그때 은률 군수가 친일파이었는데 구월산의 독립군들은 은률군청을 습격해서 군수를 사살하였다.
우종서 목사는 구월산 독립군과 연락을 유지하면서 협력했는데 이 일이 탄로가 나서 1년 반 감옥살이를 하였다.
우종서 목사가 은률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14년에 교회당이 건립되었고, 은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다음에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부임하였다.
임택권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7회(1914년)로 졸업한 분인데 임택권 목사가 은률읍교회에 부임하신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은률읍교회에서 3년 간 일하고 1918년에 일본 고베신학교에 유학을 떠난 것이 확실하니까 1915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택권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안신(安信)학교 교장을 하였고, 목회를 하면서 재령에 있는 기독교교육기관인 명신(明新)학교 교장도 역임하였다.
1924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28회(1933년) 졸업생인 정재호(鄭在浩) 목사가 부임했다.
정 목사는 숭실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은율읍교회에 오기 전에는 숭실중학교 교목 겸 사감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정재호 목사는 은률읍교회를 담임하던 중에 병을 얻어 1949년에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갔다.
▣ ‘내가 부자가 된 것은 십일조와 새벽기도 때문’ ▣
그런데 은률읍교회에는 담임목사들과 함께 꼭 소개해 드려야 하는 장로가 한 분 있다.
이찬영(李讚永) 장로가 그 분인데(교회역사, 특히 북한교회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다가 별세한 이찬영 목사외는 동명이인. 이찬영 장로는 1870년 출생, 이찬영 목사는 1925년 출생) 이찬영 장로는 은률읍교회 설립자 가운데 한 분이다.
이 장로는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몇 사람과 함께 은률읍교회를 세웠다.
당시 이찬영은 더벅머리 총각이었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석유장사를 하였고, 그 다음에는 땅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새벽기도회와 십일조를 빼먹은 일이 없었다.
부지런히 일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었는데 “내가 부자가 된 것은 십일조와 새벽기도 때문이다”라고 늘 말했다.
그는 봉헌과 구제에도 모범을 보였다.
이찬영은 은률읍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이른바 ‘토지개혁’이라믄 것을 할 때 이 장로도 토지를 모두 빼앗겼는데 그 때도 ‘아, 교회에 십일조를 많이 하지 못하게 되었네!’ 제일 먼저 이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6․25 전에 자녀들을 모두 남으로 보내고 자신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았는데 소식이 끊어졌다.
▣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는 ‘옛 례배당’ ▣
은률읍교회의 예배당에 대해서는 북한이 공산화된 후에 공산당이 민청 사무실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6․25 때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 자리에 무슨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최근, 북한선전 화보에서 은률군에는 현재 기역 자 형태의 큰 기와집으로 된 예배당이 “옛 례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옛 례배당”의 마당에는 이 교회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서 있고, 북한 주민들이 단체로 찾는 곳이고, 안내원(강사)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은륭읍교회에 출석하던 연세 많은 신도 한 분이 이 사진을 보고 은률읍교회가 맞다고, 손으로 짚어가면서 여기에는 무엇이 있었고, 저기에는 무엇이 있었다고 회상을 하기도 하였다.
북한 당국이 왜 이 교회당을 잘 보존하고 주민들이 순례하도록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북한은 옛 교회 건물을 이런 식으로 보존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매우 희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은률읍교회의 옛 주소는 황해도 은률군 은률면 남천리(南川里)이다.
은률읍에 남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남산 앞으로 흐른다고 해서 남산천이라고도 하고, 수달이 많이 살아서 수다리개울이라고도 했는데, 남천 옆에 있는 마을을 남천리라고 했다.
이 남천리는 1952년에 은률읍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은률읍교회가 있었던 곳은 황해남도 은률군 은률읍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