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 풍천읍(豊川邑)교회(송화군 소재) -반공운동(신탁통치운동반대)에 앞장섰던 교회 -
-반공운동(신탁통치운동반대)에 앞장섰던 교회 -
풍천읍교회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해면(豊海面) 성상리(城上里)에 있었는데 풍해면은 예전에는 풍천군이었다.
옛날에는 풍주(豊州)라고 했다가 조선조 태종 시절에 풍천군이 되었다.
그 뒤 한 때는 풍율군(豊栗郡)이라고 했다가 다시 풍천군이 되었다.
풍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는 군보다 위인 도호부(都護府)였다.
그 뒤에 송화군 풍해면이 되었는데 이곳 출신 인사들은 지금도 “풍천”이라는 이름을 더 즐겨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과를 비롯하여 과일들이 풍성하게 생산된다.
▣ 평양의 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
풍천읍교회는 1895년에 설립되었다.
이면주(李冕周)라는 분이 평양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교회가 없는 것을 보고 열심히 전도했다.
이 소식을 듣고 평양에 있던, 사무엘 마펫, 그래함 리, 이런 선교사들이 찾아와서 힘써 복음을 전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때 평양에 있는 교회들이 황해도 전도에 많이 힘썼다.
평양의 기독교 교세가 워낙 강했고 또 황해도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상리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설립되어서 30년 정도는 “성상리교회”라고 하다가 풍천읍교회라고 이름을 바꿨다. 성상리는 “토성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초대 장로 한치순 ▣
이곳에 규모가 큰 제방공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공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기술자들과 인부들이 왔다.
그 가운데 한치순(韓致淳)이라는 분과 정기호(鄭基鎬)라는 분이 있었는데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다.
이 분들이 성상리에 계속 머물러 살면서 교회를 잘 섬겨서 풍천읍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앞에서 재령군에 있었던 신환포교회 이야기를 할 때(42번) “신환포교회가 세워지는데는 한치순이라는 분의 역할이 컸다”고 했는데 바로 그 한치순이 풍천읍교회가 성장하는데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한치순은 풍천읍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고, 황해도 일대에서 열심히 전도해서 재령군에 상거동(上巨洞)교회ㆍ 강촌(江村) 교회, 안악군에 덕산(德山)교회ㆍ대동(大洞)교회․금산(金山)교회, 봉산군에 당포동(唐浦洞)교회․모동(慕洞)교회, 신천군에 정녀(貞女)교회를 세웠다.
이분은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이렇게 전도를 열심히 했다.
풍천읍교회에는 양재(養材)학교가 있었다.
‘인재를 기르는 학교’란 뜻인데 한치순 장로는 양재학교의 교장으로도 수고했다.
처음에는 평양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이 풍천읍교회를 돌보았고, 재령에 선교부가 생긴 다음에는 쿤스(E,W. Koons: 君芮彬) 선교사, 커(W. C. Kerr: 孔韋亮)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義林) 선교사 등 재령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그 일을 맡았다.
그 때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분들인데 커 선교사는 예외로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숭실대학 학장을 지낸 한국 이름 배위량(裵偉良) 선교사의 둘째 아들이다.
▣ 3․1 만세운동에 앞장 선 교회 ▣
한국인 교역자들은 1914년부터 풍천읍교회를 담임했는데 초대 담임자는 장덕상(張德尙)) 목사이다.
장 목사는 1913년에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덕상 목사가 풍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때 풍천읍교회가 설립한 양재학교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풍천읍교회 교인들이 풍천읍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풍천읍에서는 4월 11일에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시위를 시작할 때 장덕상 목사가 기도를 했다.
제2대는 김윤점(金允漸) 목사이다.
1921년에 부임했는데 김윤점 목사는 뒤에 봉산군에 있는 유정리(柳亭里)교회를 오래 담임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3대는 정원형(鄭元衡)목사이다.
1923년에 부임했는데 정원형 목사가 풍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교회 이름이 성상리교회에서 풍천읍교회로 바뀌었다. 그리고 교회당을 신축했는데 설흔두 칸짜리 기와집이었다.
종탑은 붉은 벽돌로 지었는데 풍천읍에서 붉은 벽돌을 사용한 것은 풍천읍교회 종탑이 최초라고 한다.
이 교회 이용은(李龍恩)이라는 교인이 환갑이 되었는데 자녀들이 환갑잔치를 크게 해 드리려고 하니까 그 비용으로 교회종탑을 세우자고 해서 이 종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시계를 가진 집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시간을 알았다. 교회의 종탑이 마을의 시계탑 역할을 하기도 한 것이다.
▣ 순교자 김태석 목사, 원춘도 목사 ▣
제4대는 김태석(金泰錫) 목사이다.
1927년에 부임했는데 김태석 목사가 풍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태석 목사가 해방 후 공산정권에게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교했다.
김태석 목사의 아들이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인 김원벽(金元璧) 선생이다.
김원벽 선생은 연희전문, 지금 연세대학 재학 중에 3․1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는데 당시 실무를 맡아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제5대는 황금천(黃金泉) 목사님이다.
당시 장로교 목사님은 대부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했는데 황금천 목사는 중국 동북지역 심양, 그 때 이름 봉천에 있었던 봉천신학원을 졸업했다.
횡금천 목사는 1945년 9월에 풍천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해방 뒤에 풍천읍교회를 담임하였는데 풍천읍교회는 황 목사의 지도하에 반공운동, 특히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공산정권의 체포대상이 된 황 목사는 월남하여 군목 1기생이 되어 군복음화에 힘썼다.
황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으로 시무하시던 때에 강대상에서 설교하던 중에 하늘나라로 갔다.
제6대 담임은 이근형(李根亨) 목사이다.
이근형 목사는 1946년에 부임했는데 공산치하에서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서 목회를 했다.
이 때 공산정권은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이라는 친정권적인 단체를 조직해서 교회를 조종했는데 풍천읍교회 중직들이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을 반대하다가 어러 명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로, 풍천읍교회라고 하면 해방 후 반공운동의 선봉에 섰던 교회로 유명하다.
풍천읍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동지회라는 반공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거의 모두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치룬 일도 있다.
마지막 담임은 원춘도(元春道)목사이다.
원 목사는 1949년에 부임했는데 6․25 당시 옥중에서 순교했다.
▣ 폭격으로 파괴되다 ▣
풍천읍교회가 있었던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는 현재는 황해남도 과일군 세교리(細橋里)이다.
북한은 1967년에 송화군의 서부지역을 과일군으로 분립시켰다.
앞에서, 이곳에서는 과일이 많이 난다고 하였는데, 북한은 일찍부터 이곳을 송화과수농장지구라고 하다가 아예 과일군으로 만든 것이다.
풍천읍교회가 있었던 성상리는 장천리와 합하여 세교리가 되었는데 세교리에도 과수원이 많다.
세교리 농경지의 92%가 과수원으로서 사과, 배,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다.
풍천읍교회는 1951년 3월에 폭격으로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풍천읍교회 교인들이 군산으로 많이 피난왔는데 군산에 군산제일장로교회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