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을 찾아서/황해도

(0039) 장단읍(長端邑)감리교회 -군사분계선상에 있었던 교회-

산종 유관지 2023. 5. 25. 11:36

(0039)장단읍감리교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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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읍교회는 경기도 장단군에 있었는데 장단군은 개성 동쪽 바로 옆, 38선 바로 밑, 오늘날에는 군사분계선 바로 위에 있었던 곳이다.

장단역은 군사분계선상에 있으며 역사(驛舍)는 소실되고 플랫 홈만 남아 있다.

 

이장포교회를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

개성 일대는 남감리회 선교구역이어서 이 일대의 교회들은 대부분 감리교회였다.

장단읍교회는 감리교 중부연회 개성지방에 속해 있었다.

장단읍교회는 1901년에 설립되었다.

1898년부터 감리교 전도인들이 개성에 갈 때 장단에 꼭 들려 열심히 전도했다고 하는데 그 열매로 1901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단읍교회는 이장포(梨長浦)교회를 바탕으로 하고 설립되었다.

이 이장포교회는 나중에 기도처로 격하가 되었는데, 주소는 장단군 진동면 동파리(東波里) 748 번지로서, 지금은 남한 땅이다.

감리교의 개성 선교 책임자인 콜리어(C. T. Collyer) 선교사가 1903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장단읍교회 설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다.

그대로 옮긴다.

장단(Chang-dan)은 송도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으로 1901년에 교회를 조직해서 22명의 입교인과 8명의 학습인들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자면 장단에서 반경 20리 정도 되는 거리를 모두 포함해서 그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최근까지 이 신앙공동체는 그 중심지가 이장포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이장포속회라고 불리었습니다. 이곳에서 속회가 조직된 후 맹인인 매서인과 그 아내인 엘리자벳 전도사가 군 소재지로 옮겼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수요일과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4분의 1 정도되는 교인들이 장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장포에 남아있는 교회보다 매서인의 집이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예배가 시작된 것은 아직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전망은 아주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 교회 사람들이 넓은 지역에 걱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교회가 더 발전하면 이곳이 다른 여러 교회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제는 이장포에 있는 교회를 포기하고 이곳 마을에 있는 집을 교회로 사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동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현명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 소재지에 있는 교회는 그곳 전체에 있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립자는 시각장애인 백사겸

<매서인 백사겸>

여기에 나오는 맹인인 매서인의 집이 장단읍교회가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각장애인 매서인은 백사겸(白士兼)이다.

백사겸은 1860년에 평남 순안에서 태어났는데 아홉 살 때 안질 때문에 시작장애인이 되었고 또 고아가 되었다.

백사겸은 고양에서 복술가 생활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사람들을 속여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없는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는데, 그러던 중에 전도지를 받게 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은 산통(算筒)을 받는 꿈을 꾸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고양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전도에 힘쓰게 되었다.

백사겸은 장단을 비롯하여 철원풍덕김화평강고양파주평양 부근까지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장단읍교회의 설립자도 백사겸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사겸의 아들 백남석은 에모리대학을 나온 뒤 연희전문 교수가 되어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역대 담임자들

 

장단읍교회를 두 차례 담임하였던 신공숙(申公淑) 목사는 매우 독특한 경력을 가진 분이다.. 이 분은 개성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배의(培義)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자기가 먼저 상투를 자르고 그 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교사가 되어 산수와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니까 설립자ㆍ학생ㆍ교사를 모두 거친 셈이다..

신공숙 목사는 선교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독립교회를 세운 일도 있었고, 북간도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선교사들과 화해를 하고 1911년에 남감리회의 전도인이 되었다.

이 분이 처음 담임한 교회가 장단읍교회 외 세 교회였다.

신공숙 목사는 그 뒤 서울로 목회지를 옮겼다가 다시 장단읍교회로 돌아왔다.

그 뒤에는 송도중학교 교목도 하였고, 일본에 가서 재일 동포들을 위해 목회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지금 서울 정부종합청사 부근에 있는 종교교회에서 오랜 기간 목회했다.

1924년에는 황용준(黃龍俊) 전도사가 담임하였다.

1931년부터 여러 해 동안은 이원섭(李元燮)) 목사가 담임하였다.

이원섭 목사는 1922년에 이미 장단읍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한 분이다.

이원섭 목사가 장단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유리선(柳利善)이라는 여 전도사가 목회를 도왔다.

장단읍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교회와 기도처들이 하나의 구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들의 이름은 주산동(周山洞)교회ㆍ거곡리(巨谷里)기도처ㆍ이장포기도처ㆍ감암동(甘岩洞) 기도처 등이다.

이원섭 목사가 장단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32년에 이 교회와 기도처들이 연합해서 부흥회를 개최해서 새 신자를 70명 얻었다.

그리고 파주읍교회를 개척했는데 벽돌기와 열두 칸 예배당을 지었고 50명 내지 60명이 출석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단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와 기도처들이 연합해서 개척한 파주읍교회가 오늘날 파주읍에 있는 파주감리교회인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원섭 목사는 뒤에 안변감리교회도 담임하였다.

원산 일대는 캐나다장로회와 미남감리회의 공동선교구역이어서 안변에는 감리교회도 있었다.

1934년에는 유기흠(柳冀欽) 목사가 담임하였다.

유기흠 목사도 개성 출신으로 개성 주변에서 목회를 하였고, 개성에 있는 남성병원 원목도 지냈다.

유기흠 목사의 뒤를 이어 1937년에는 김동헌(金東憲) 전도사, 그 다음에 이윤석(李胤錫) 목사가 부임하였다.

이윤석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경기도 가평군 출신으로 31 운동 때 가평군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로 옥고를 치루었고,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예수를 믿고 협성신학교(오늘날의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홍천에서 목회하다가 독립운동 때문에 다시 한 번 감옥생활을 했다.

이윤석 목사는 장단읍교회를 담임한 것을 제외하면 주로 고향인 가평에서 목회를 하였다.

1940년에는 이겸목(李謙牧) 목사가 장단읍교회를 담임하였다.

 

교역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

장단읍교회는 교역자를 많이 배출한 교회로 유명하다.

장단읍교회에서 남감리교회의 기둥과 같은 목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장단읍교회에는 전사명(全士明)이라는 유명한 평신도가 있었다.

전사명은 한의사였는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해서 십일조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단읍교회의 예전 주소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읍 읍내리 92번지이다.

<십일조 할아버지와 유아원생들>

예배당은 목조함석에 기와지붕 아홉 칸 반 규모였고, 목사관과 교회 유지를 위한 밭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홉 칸 반 규모의 여자관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자관은 아마도 사회복지 시설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장단읍교회가 있었던 경기도 장단군 장단읍 읍내리 92번지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장단군 가운데로 38선이 지나서 해방 뒤에 장단군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장단읍은 시작부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남한에 속했었는데, 북에서는 장단군의 남은 부분과 개풍군의 일부를 합해서 장풍군(長豊郡)을 새로 만들었다.

북한의 장풍군은 황해북도에 속해 있다. 그러니까 장단군은 없어진 셈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장단군은 예전 행정구역을 가지고 현재의 행정구역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