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 성공회 백천성당 -강화도에서 바라보이는 백천에 있었던 교회-
성공회는 종교개혁 다음에 발생한 3대 교파(루터교․ 개혁교회․성공회) 가운데 하나로서,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성공회는 1889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첫 선교사는 영국 해군 군종신부인 코르프(C. J. Corfe:高堯翰) 주교였다.
코르프 주교는 독신으로 청빈한 생활을 한 분인데 1890년에 한국에 왔다.
▣ 워너 선교사 ▣
두 번째로 온 레오라르드 워너(Leonard O. Warner: 왕란도) 선교사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성공회의 백천 선교를 시작했다.
(백천의 한자 표기 ‘白川’인데, 현재 북에서는 공식적으로 ‘배천’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전 표기를 따라 ‘백천’이라고 하기로 한다.)
워너 선교사는 1893년부터 강화 선교의 책임을 맡았는데 이 때 백천 지방 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백천을 왕래하면서 전도활동을 했고, 백천 지방의 신자들이 스스로 집을 구입해서 성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성공회 백천 성당의 공식적인 설립연도와 성당이 어느 곳에 세워졌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천군은 남한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교동도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은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백천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생겼다.
한때는 은산(銀山)이라고도 했고, 예전에는 백천군 안에 은천면(銀川面)이 있었다.
예전에는 경기도에 속했다가 조선왕조 때 황해도로 이관되었는데 한 때는 연안군과 합해서 연백군이 되었다가 1952년에 백천군이 되었고, 현재는 황해남도에 속해 있다.
온천이 유명하며, 동쪽으로 예성강이 흐르면서 황해북도 금천군과 개풍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성교회에서 감리교가 나왔는데, 백천은 감리교 선교구역이었다.
▣ 김희준 신부 ▣
성공회 백천성당을 섬겼던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김희준 신부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김희준 신부는 강화 출신으로 한국성공회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사제 서품(목사 안수)을 받은 분이다.
강화도에 가면 한국식으로 지은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는데, 여기에 김희준 신부의 사제서품 증명서가 ‘면허장’이라는 이름으로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면허장에는 1916년 12월 17일에 서품을 받았고, 교회에서 쓰는 이름은 마가라고 적혀 있다.

김희준 신부는 1908년 여름에 백천 지방 전도사로 부임했다. 김희준 전도사가 부임하고 나서 석 달 뒤인 1908년 10월 18일에 남자 9명, 여자 10명이 영세성사(세례)를 받았다.
이 날 백천성당이 일종의 봉헌식 같은 것도 한 것을 보아 10월 28일이 성공회 백천성당의 창립기념일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1909년 백천성당의 신도는 모두 313명이었다.
▣ 강화선교구에서 독립된 선교구로 ▣

초기에 한국 성공회는 서울ㆍ강화ㆍ수원ㆍ진천, 네 개의 선교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백천성당은 강화선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백천이 독립된 선교지역이 되어 황해도에 있는 성공회들을 모두 담당했다.
백천 전도구는 교리공부를 위한 한글교육, 중류층과 하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선교, 전도집회, 기도집회, 수련회, 평신도 지도자 양성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병원도 운영했다.
1930년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성공회 백천전도구에서는 전도대회가 열렸다.
이 전도대회의 강사는 김인순 신부와 윤달용(尹達鏞) 신부였는데 성과가 아주 컸다. 윤달용 신부는 “이런 일은 백천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필요하다”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윤달용 신부는 6․25 전쟁 당시 한국성공회의 총감사제이었는데 강제로 북으로 끌려가서 순교당했다.
▣ 북한 지역 전도에 열심이었던 성공회 주교들 ▣
한국의 성공회 주교들은 북한 지역 전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황해도 안에도 해주ㆍ사리원ㆍ연안 등지에 성공회가 생겼다.
해주는 지금 황해남도의 도 인민정부 소재지이고, 사리원은 황해북도의 도 인민정부 소재지이다.
한국교회는 1940년대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이 무렵에 백천 전도구도 많이 쇠퇴했다.
백천 성당, 그리고 백천 선교구는 성공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북한에 있었던 성공회 성당에 대한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데 백천 선교구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록과 회고담이 전해지고 있다.
백천 성당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백천군의 중심지인 백천읍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천읍은 해방 뒤에는 남한 땅이었다.
지도를 펴면 백천읍이 38선 바로 밑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6ㆍ25 전쟁 때 이 지역이 북한 땅이 되었다.

백천선 철로가 백천군을 통과하고 있다.
백천군 안에서 기억해야 할 곳은 벽란도(碧瀾渡)이다.
벽란도의 다른 이름은 예성항(禮城港)으로서, 예성강 하류에 있는 포구인데 고려 시대에는 송나라와 무역, 외교에서 큰 역할을 했다.
강화도 제적봉에 있는 평화전망대에서 이 벽란도가 내려다보이는데 지금은 아주 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