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8)두남리(斗南里)감리교회(함남 덕원)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고향에 있었던 교회-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고향에 있었던 교회-
두남리감리교회의 예전 주소는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현면(縣面) 두남리 627의 2이였다.
덕원군은 원래 의주(宜州)라고 부르다가 1413년에 의천군(宜川郡)이라고 했는데 세종대왕 때인 1437년에 이성계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하여, ‘덕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덕원군(德源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일제 강점 직후에는 원산부가 되었는데, 일제는 1914년에 원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교외(郊外) 지역을 덕원군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 덕원군을 나누어서 원산시와 문천군에 편입시켜버려 덕원군은 없어졌다.
두남리감리교회가 있었던 두남리는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 룡천리(龍川里)가 되어 있다. 용천리는 원산시의 동남부지역으로 바다를 끼고 있고 안변과 경계가 되는 곳지다. 경치 좋은 휴양지인 명사십리가 부근에 있다.
두남리라는 이름은 두남산 열두 봉우리를 끼고 앉은 마을이라고 하여 생겼다고 하니 통일된 다음에 두남리감리교회가 있었던 자리를 찾으려면 두남산 열두봉우리를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산천은 의구할 테니까 말이다.
▣ 덕원수도원(가톨릭)의 수난 ▣
덕원은 한국 가톨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1920년에 가톨릭의 원산교구가 독립을 했는데 베네딕트(Bedict : 芬道)수도회가 이 지역을 맡았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덕원군 부내면(府內面)에 수도원과 신학교를 세웠다.
덕원수도원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당국에 강제로 빼앗겼다가 해방 후 되찾았는데, 공산치하에서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에 경리책임자인 외국인 신부가 체포당했고, 그 후에는 신부 전원과 신학생들이 모두 연행되거나 수도원에서 추방되었다. 이들 가운데 여럿이 평양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거나 처형당했다.
해방 후 북한의 가톨릭도 이와 같이 북한정권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 두남리교회 관련 기록들 ▣
두남리감리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장로교는 교회별로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인데, 감리교는 그렇지 않고, 지역별로 감리교가 그곳에서 언제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룰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일이 많아서 교회별 역사는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경우가 흔하다.
덕원은 원래 원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산 지역은 미 남감리회가 선교를 담당했는데 1923년에 열린 남감리회 제6회 연회록을 보면 덕원선교처에 카터 선교사와 서리 1인을 파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두남리감리교회는 이 무렵에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4년에 열린 제7회 연회에서는 덕원선교처에 천어(天御)선교사와 곽명리(郭明理)전도사가 파송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는 서원필(徐元弼) 목사가 파송을 받았다.
1925년에서 1928년 사이의 연회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고, 1929년에 열린 제12회 연회록을 보면 ‘안덕(安德) 선교처’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변과 덕원을 합해 안덕선교처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안덕 선교처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서리 전도사가 파송을 받았다.
1931년에는 ‘덕원 구역’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덕원 구역의 주소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때는 두남리감리교회 확실하게 세워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32년에는 덕원 구역 대신에 ‘안덕(安德)구역’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감리교회는 예전에 한 교회에 한 교역자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교회를 묶어 한 교역자를 파송했다. 교역자가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 교역자가 담임하는 이 몇 개의 교회를 ‘구역’이라고 불렀다.
안덕구역에는 이영한(李英漢)전도사가 파송을 받았다.
1937년의 기록에는 ‘원덕(元德)구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두남리교회의 이름도 나온다.
당시 원덕구역에는 원산의 관교동(館橋洞)교회와 중청리(中淸里)교회, 덕원의 두남리교회와 성북리(城北里)교회, 그리고 연두도리(連斗島里)교회, 이 다섯 개의 교회가 속해 있었다.
1939년에는 이수만(李壽萬) 목사가 원덕구역에 파송을 받았는데 이수만 목사는 1940년대 초반까지 원덕 구역에서 사역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수만 목사는 개성 출신으로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을 거쳐, 1927년에 감리교신학대학을 제 졸업하고(제13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개성 지역과 강원도 지역에서 목회를 했는데, 한 때는 서울에 있는 자교교회도 담임했었다.
그는 1927년부터 원산 지역에서 일하면서 원산 지방 감리사도 지냈는데 1949년에 하늘 나라로 갔다.
▣ 최용신의 고향 ▣
두남리감리교회의 예배당은 43평으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는데 ‘연와조 함석즙’(煉瓦造緘錫葺)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와와 함석으로 지붕을 했던 것 같다.
이 교회는 대지와 밭을 1,500평 가량 가지고 있었다.
이 교회와 땅은 모두 부라만(夫羅萬) 선교사의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부라만 선교사의 미국 이름은 브래넌(L. C. Brannan) 인데 1910년에 한국에 와서 원산과 춘천과 개성에서 일한 분으로서 미국으로 돌아가서 은퇴한 다음에도 한국을 돕기에 힘썼다.
감리교는 주안에 원로목사들을 위한 원로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원로원은 브래넌 선교사의 수고를 통해 건축된 것이다.
그에게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어렸을 때 한국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따님은 춘천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농촌계몽운동가로, 「상록수」라는 소설과 영화로 잘 알려진 최용신(崔容信) 선생의 고향이 바로 두남리이다.
최용신 선생은 1909년에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씨의 3녀로 태어났다. 5남매 중 셋째였는데, 할아버지가 인재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집안이었다.
최용신은 1928년에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두남리감리교회에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